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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지 베스트 'Best is Best'
    꺼리들/스포츠 이야기 2007. 9. 2. 00:13
    오늘 마지막 업로드... 하루가 시작되었지만... 뭐 개인적인 하루의 마침의 시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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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 선수 조지 베스트에 관한 기사입니다.
    이 선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언젠가 위닝을 하면서 레젼드에서 이 선수의 이름을 봤습니다.
    엄청난 능력치를 가지고 있더군요. 이름도 BEST
    그의 죽음에 관한 기사입니다.
    술과 담배는 당신의 인생을 망칠 수 있습니다.
    by 스베르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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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커 레전드] 조지 베스트 'Best is Best'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이데일리 = 독일 아헨 차상엽 특파원]"Best is Best". 이는 조지 베스트(George Best)의 팬들이 그를 가리키는 표현으로써 말 그대로 '베스트는 최고'라는 뜻이다.

    베 스트 팬들의 표현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베스트는 오른쪽 날개로서 모든 선수들 중 최고였으며 그를 막을 수 있는 수비수는 거의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베스트는 갖은 스캔들로 인해 타블로이드 신문지면에까지 최고를 달렸다.

    ▲베스트 '버스비와 만나다'

    1946 년 5월 22일 북아일랜드의 수도인 벨파스트에서 태어난 베스트는 줄곧 고향에서 성장했다. 베스트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데에는 가족들의 도움이 컸는데 아버지 역시 축구 선수 생활을 한 바 있으며 어머니 역시 필드 하키를 했던 운동선수 집안이었다. 특히 어머니는 국가 대표로도 여러차례 뽑혔을만큼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베스트가 어린 시절부터 운동에 재능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처음에는 축구가 아닌 럭비 선수의 길을 가려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뒤를 이어 축구장에 일생을 바치게 됐다.

    베 스트는 일찌감치 그의 재능을 인정 받았다. 15세이던 1961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스팀의 입단 테스트에 참여해 합격을 한 것. 하지만 베스트는 명문구단의 합격증 받고서도 향수병으로 인해 이틀만에 벨파스트로 돌아왔다. 베스트의 아버지는 벨파스트로 돌아온 그를 불쌍하게 여겼지만 다시 맨체스터의 캠프로 데려가 팀의 감독을 맡고 있던 매트 버스비에게 아들을 특별히 부탁한 뒤 북아일랜드로 돌아왔다.

    버스비는 젊은 선수들을 체계적으로 지도하는 능력으로 정평이 난 지도자. '버스비의 아이들(Busby Babes)'이라는 칭호를 얻었던 영건들을 주축삼아 1956년과 1957년에 리그 2연패를 달성하기도 했었다.

    버스비는 베스트를 만날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베스트는 내가 살면서 보아온 선수들 중 가장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다"

    ▲웸블리에 울려퍼진 "Best is Best"

    1963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레스터 시티와의 FA컵 결승에 올랐지만 베스트는 아쉽게도 경기에 나설 수 없었다. 17세의 나이로 맨체스터에서 주전 자리를 확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

    하 지만 1963-64시즌부터 베스트는 항상 그라운드에 서 있었고 팀이 리그 준우승을 차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맨체스터에는 베스트 외에도 보비 찰튼과 데니스 로라는 불세출의 스타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 3명은 맨체스터의 첫번째 전성기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3인방으로 현재까지 회자된다.

    그러나 유럽 무대에서 베스트라는 이름이 알려진 시기는 1965-66시즌이었다. 지금의 UEFA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챔피언스컵에서 맨체스터는 당대 최강의 클럽 중 하나이며 에우제비오의 소속팀인 포르투갈의 벤피카와 대결하게 된 것. 맨체스터는 원정경기에서 5-1로 대승, 4강행을 확정지었고 베스트는 5골 중 3골을 작렬하며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베스트는 1968년 리그에서 28골을 기록하며 생애 첫 득점왕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소속팀을 챔피언스컵 결승에까지 진출시켰다. 웸블리스타디움에서 열린 결승전의 상대는 바로 '베스트' 석자를 유럽에 알리게 했던 벤피카. 10만여명의 관중들이 운집한 가운데 벌어진 결승전에서 맨체스터는 4-1 완승을 거두고 클럽 역사상 첫 유럽무대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두 팀은 90분간의 열전을 1-1로 마친 뒤 연장전으로 접어들었고 베스트는 연장 전반 2분만에 역전골을 성공시켜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결승전이 끝나면서 관중들은 "Best is Best"를 외치기 시작했고 이는 곧바로 언론사들의 헤드라인을 장식, 베스트를 상징하는 문구가 되어버렸다.

    ▲베스트 '방랑자에서 뉴스메이커까지'

    베스트에게는 축구 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사 업에도 일찌감치 눈을 뜬 베스트는 현역으로 활동할 때 여러 개의 의상실을 운영했으며 지금은 그라운드에서 보편화된 장발을 유행시킨 선수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긴 머리 스타일을 가진 선수들이 거의 없었는데 베스트의 장발은 곧바로 젊은 팬들에게 어필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비틀스'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69년 맨체스터는 챔피언스컵에서 다시 한번 4강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지만 준결승에서 AC밀란의 벽을 넘지 못하고 아쉽게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원정에서 0-2로 패한 맨체스터는 홈에서 반전을 노렸지만 1-0 승리에 그쳐 결국 탈락한 것이다.

    사실 맨체스터의 4강 진출은 그리 나쁜 성적이 아니었지만 베스트에 대한 언론의 시각만큼은 우호적이지 못했다. 특유의 방랑 기질을 보이고 있었던 베스트는 팀 훈련이 열릴 때 감독의 눈을 피해 나무 밑에서 잠을 자거나 아예 나타나지 않는 등 문제를 자주 일으켰다. 베스트의 '플레이보이' 이미지 역시 이 때부터 팬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베스트는 이후 "지난 7~8년 동안 나와 잠자리를 같이한 여성이 대략 1천명은 될 것이다"라며 문란한 사생활을 공적인 자리에서 밝히거나 "술값이나 고가의 자동차 구입에 쓰는 돈이 내 지출의 대부분이다. 나머지 돈은 어디에 쓰는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등 문제가 될 만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내뱉어 언론의 1면을 자주 오르내렸다.

    1973년을 끝으로 베스트는 맨체스터를 떠났다. '레드 데블스'의 유니폼을 입고 349경기에 출장, 134골을 기록한 것이 맨체스터 소속일 때 그가 남긴 기록이었다. 베스트는 이후 1974년부터 1981년까지 7년간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미국에서 무려 9번이나 다른 유니폼을 입어야만 했는데 음주로 인한 말썽은 베스트의 계약을 모두 중도에 해지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77년부터 북아일랜드 대표로서 마지막 국제 경기를 치른 베스트는 1964년부터 1977년까지 A매치에 37번 출장, 9골을 기록한 바 있다. 1983년 베스트는 호주 프로축구 브리즈번 라이온스를 끝으로 파란만장햇던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짧은 축구선수 생활, 그리고 짧은 인생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다는 평가를 숱하게 들었던 베스트. 그러나 술과 여자 문제 역시 베스트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베스트는 현역 생활 중 알콜 중독 치료를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은퇴 이후인 1984년에는 음주 운전으로 3개월간 감옥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음주 단속 경찰을 피해 도주하다 경찰을 다치게 한 죄로 감옥 신세를 졌던 것이다.

    결국 베스트는 2002년부터는 오랜동안 지나친 과음에 따른 간 질환으로 인공간을 이식해 살아 왔다. 의사로부터 술을 입에 대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가 있었지만 베스트는 다시 술병을 자신의 곁에 두기 시작했고 지난 25일 합병증으로 인해 59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베스트는 운명한 이후에도 영국 축구의 베스트였다. 27일 리버풀 구디슨 파크에서 벌어진 에버튼과 뉴캐슬 유나이티드 간의 경기 직전 두팀 선수들이 베스트를 추모하고 있다. 사진 = 로이터(리버풀)]
    (독일 아헨 = 차상엽 특파원 sycha@mydaily.co.kr)
    출처 : 뉴스 > 마이데일리 2005-11-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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