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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 개론
    주인장 낙서 2014. 3. 5. 14:45

    구약 개론

    김00 목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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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그동안 후배들과 더불어 구약을 연구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았다. 구약 39권에 대한 간략한 내용 파악과 구약의 배경이 되는 고대 근동의 역사, 그리고 생활 풍습, 아울러 문학적 양식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기에 배우고 가르치는 모두가 힘든 시간들이었다. 이때 가장 아쉬운 것 중 하나는 우리형편에 맞는 교재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어려움을 해결해 보고자 그 동안 강의해 오던 자료들을 모으고, 편집하고, 많은 양은 새로 쓰면서 교재를 만들었다. 물론 훌륭한 개론서에 비하면 뒤쳐지는 면이 있겠지만 그 동안 고심하던 문제점들을 해결하고자 노력한 산물이니 구약 개론을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될 줄 안다.

    국내에 소개 된 구약개론서 중에서 손에 꼽을 수 있는 것은 우선 1960년 3월에 기독교 서회에서 발행 된 {구약성서개론}이다. 이 책은 파이퍼 교수의 구약개론을 박대선, 김정준, 김찬국 교수가 편역하였다. 그리고 1978년에는 독일 학자 E. 젤린, G. 포러의 {구약성서개론}이 김이곤, 문희석, 민영진에 의해서 편역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역사비평학쪽으로 너무 기울어져 난해한 점이 지적된다. 국내학자들의 개론서는 구덕관, {구약개론상, 하}, 최종진, {구약성서개론}, 박준서, {구약개론} 등이다. 이밖에도 많은 책들이 번역되거나 저작되어 구약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책을 읽든지 구약성서를 곁에 두고 확인하고 대조해 보아야 할 줄 안다.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도 구약 39권을 기초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성서를 직접 읽는 사람보다는 성서에 관한 주변책들을 더 많이 읽는 사람이 많다. 바라는 것은 구약개론을 수강하는 모든 학생들이 이제는 직접 성서를 펴서 읽었으면 한다. 아울러 본서도 성경을 직접 읽는 데 도움을 주고 독려하는 책이 되었으면 한다.

    1996년 2월 23일 편자.


    제1장 서론

    1. 오늘날 성경의 가치와 위치

    우리 앞에는 성경이라고 불리는 위대한 책이 역사의 유산으로서 남겨져 있다. 많은 현대인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해 내고 감격해 하며, 그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는 자주 접하곤 한다. 즉 성경은 박물관 속에 보관되어진 죽은 책이 아니라, 많은 시간과 공간이 흐른 오늘날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살아있는 거룩한 책이다.(1

    오늘 우리에게도 그 같은 감격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 이제 우리는 성경, 그 중에서도 구약성경을 아주 자세하게 관찰하면서 많은 것들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가지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물어올 때 우리 자신은 성경 앞에서 진지하게 대답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은 우리에게 침묵하고 말 것이다. 성경은 성경에서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덤비는 사람들에게 물음을 던지는 책이다.

    정보와 통신이 권력으로서 그 위치를 굳히고 있는 오늘날, 이런 분야에서 선두주자를 달리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으며 인간은 그 문제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 동안 사람들은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과학과 첨단 지식에서 인간의 행복과 미래를 보장받고 싶어했지만 그 꿈은 점점 무산되어져 갔다.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무너진 도덕성의 회복이야말로 인류의 미래를 책임 질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2 

    그러면 인간은 어떤 방법을 통하여 무너진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 쉽지가 않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온 인류를 설득하고 용납시키며 충족시켜 줄 그 어떤 권위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지금까지 그 권위를 대신해 온 것은 인간의 욕망을 부채질하며 욕심을 챙기게 한 물질문명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같은 권력 앞에서 굴복하였으며 패배를 당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한가지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경을 통해서 그 길을 열어보자는 것이다. 세계는 그들이 성경을 경전으로 인정하는 종교를 가지고 있든지, 아니든지 간에 모두 성경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물론 극소수의 반대자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같은 성경의 권위 밑에서 도덕성을 부활시키는 작업을 펼쳐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성경을 체계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2. 성경은 어떤 책인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구분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며, 예수께서 오시기 이전의 일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 구약성경이며, 예수께서 나신 이후의 일들을 기록한 책이 신약성서이다. 그리고 그 기록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대상은 히브리 민족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과 그 터전이다. 그러나 단순한 인간의 삶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창조주가 함께 하신 역사이다. 우리는 구약을 읽어가면서 바로 절대자 하나님이 인간의 땅에서 어떤 역사를 이루시는가를 목격해야 한다.

    구약성경은 39권의 책으로, 신약성경은 27권의 책으로 이루어 졌다. 따라서 성경 전체는 66권의 책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며, 교회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역사를 살펴보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66권을 인정하게 된 경위를 알 수 있다.(3 

    올해(1996년)는 성경이 우리나라말로 번역이 된지 114년이 된다. 성경 중에서 누가복음이 최초로 우리말로 번역이 되었는데 그 장소는 우리나라가 아닌 만주 봉천이며, 114년전 일이다.  그 다음으로 요한복음이 번역되었다(1882년). 그 후에 복음서, 바울서신등이 완료되어 1887년에 신약성경이 완성되었다(스코틀랜드의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와 존 맥킨타이어(John McIntyre), 이웅찬, 백홍준, 김진기의 노력으로).

    한편, 1885년 일본에서 한글 성경 번역이 있었는데 그것은 일본에서 이수정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고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그 결과 1885년 초에 마가복음이 번역되었고 이 마가복음을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입국할 때 가지고 들어왔다.

    그러나 구약은 그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1910년 비로소 전주에서 구약성경의 번역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곧 이어 성경의 개역 작업이 진행되어 1938년에 공인된 개역 성경이 출판되었으며, 1948년부터 한글 맞춤법에 의해 수정작업을 하다가 6,25사변으로 중단되었고,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난 1956년에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이 완성되었다. 이 성경이 우리가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경이다. 그 후 신교와 구교가 공동으로 작업하여 펴낸 것이 {공동번역}이며, 최근에 현대어 성경이 출판되었고, 1993년에 개신교가 독자적으로 {표준 새번역 성경}을 출판하였다.

    {표준 새번역 성경}의 출판으로 각 교계에서 여러 가지 비판의 소리가 높았으나 좀더 원문에 충실하고 현대어로된 새로운 번역이 나왔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다.


    3. 교회에서 구약의 위치

    교회 역사를 돌아볼 때 구약 성경의 위치와 권위는 상당히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1930년말에 독일에서 나치들에게 굴종했던 독일교회는 한 때 구약을 기독교 성경에서 제거해버린 일이 있었다.

    20세기 이전까지 성서 신학자들은 구약 역사 중 특별히 포로기 이후와 초기 유대교에 대하여 낮은 평가를 내리곤 하였다. 이와 같은 반유대적 사고는 신약성서와 초대 교회부터 그 뿌리가 시작되었으며, 독일의 나치 선전 하의 반유대주의 사상으로 더 굳어지게 되었다. 또 이들은 포로기 이후 시대를 국가없이 유대교가 시작되고 발전하는 시기였으므로 윤리적 개인주의와 개인적 체험이 율법적인 생활과 신앙으로 바뀐, 즉 예언적 종교가 타락한 시대로 본 것이다.(4 이와 같은 사고에 의한 부정적인 평가는 20세기의 영향력있는 학자들에게도 나타나게 되었다.(5

    이런 부정적인 평가는 20세기 중반에 고고학적인 뒷받침을 토대로 비판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새로운 가능성을 가지고 포로기 이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런 결과로 인하여 구약의 권위는 회복되었으나 통계적으로 볼 때 아직도 교회 안에서 설교는 구약보다는 신약을 더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말하는 데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 번째 견해는 구약과 신약을 대립적인 관계로 보는 견해이다. 구약은 율법, 신약은 복음으로 단정짓는 견해이다. 주후 2세기에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마르시온(Marcion)은  구약과 신약을 극단적인 대칭 관계로 대비하여 구약의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 엄격한 분노의 하나님, 진노하시는 무서운 하나님,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보았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아돌프 하르낙같은 교회사가는 마르시온의 견해는 오류가 아니었다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구약을 율법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 구약에는 율법이 속해있지만 구약전체가 율법의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율법에 해당되는 부분은 1)출20장에서 민10장 10절까지, 시내산 십계명 사건에 집중되어 있고, 2)신명기 12장에서 26장까지 모세의 설교 중에 율법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율법은 오경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이라는 말은 토라(Torah)의 번역이며, 토라의 본래 의미는 "가르침"(Teaching)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길을 친히 가르쳐 주신 가르침이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단어에서 구속, 제한적, 부정적 느낌을 강하게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토라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가르쳐 주셨다는 긍적적 의미가 크다. 토라의 외형이 율법의 형태로 되어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구약을 율법의 책으로만 보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두 번째 견해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발전적인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구약 안에서는 이스라엘 신앙이 저급한 것이었는데 점차 고등한 단계로 발전해 갔으며 결국 최종적인 단계가 신약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은 하나님의 초보적 단계의 계시의 기록이고, 신약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햇빛과 같이 밝히 빛난다는 것이다. 구약의 존재는 신약의 준비 과정으로서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신약보다 구약이 열등하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의 배후에는 헤겔 철학이 깔려있다. 헤겔 철학은 역사의 과정을 발전의 과정으로 보아서 정. 반. 합의 과정으로 발전한다고 본다. 그래서 구약은 저급한 것이며 이것이 발전하여 신약이 만들어졌으므로 우리는 신약만 가지면 된다고 한다. 이런 헤겔 철학의 영향력으로 구약의 종교가 저급한, 율법적 모세 종교로부터 시작하여, 고등하고 윤리적인 예언자 종교로 발전했다고 보는 견해가 과거에는 지배적이었다. 오늘날 2차 대전 이후 구약 신학자들은 이러한 헤겔 철학의 잘못을 떨쳐 버리는 것을 과제로 삼기도 한다.

    세 번째 견해는 구약과 신약을 약속과 성취의 관계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기독론적인 해석이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약속해준 책이고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약속의 성취를 기록했다고 본다. 교회 안의 성경공부의 대부분은 이 관계를 강조하고 있으며, 또한 옳은 주장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한가지 범주만을 가지고 구약 전체를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구약 안에는 약속과 성취라는 구조가 얼마든지 있지만 이런 한가지 구조로 구약 성경 전체를 다 이해 할 수는 없다. 특히 지혜문학에 해당되는 욥기, 잠언, 전도서 등이 그렇다. 이 부분은 예수의 오심만을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즉 구약의 모든 곳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면 구약 이해에 상당한 무리가 올 것이다.

    네 번째 견해는 구약과 신약을 동심원으로 보는 것이다. 구약은 작은 원으로서 큰 원인 신약 안에 들어 있다. 그래서 신약은 구약을 자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구약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과 신약에 계시된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다. 한 하나님께서 활동하신 역사의 기록이기 때문에 구약의 역사의 기록은 곧 우리들의 신앙의 역사이다.

    B. W. Anderson은 그리스도인은 모두 이스라엘 사람들이요.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결국 우리들은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고 활동해주신 구약의 기록은 곧 우리들의 과거 신앙의 역사가 된다. 따라서 구약을 구약 자체로 읽는 것도 우리의 신앙의 역사이기 때문에 중요한 일이다. 구약을 구약 그 자체로서, 구약 안의 역사와 정치와 종교와 문화적인 배경에서 구약 본문을 충실하게 읽고 해석하는 가운데서도 구약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즉 구약과 신약은 동심원으로 보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이고 구약이 바로 그 하나님의 활동을 기록한 것이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6


    4. 성경 이해의 역사

    성서는 불가사이의 책이다. 기록된 지 2,000년이 지났지만, 해마다 베스트셀러를 유지하고 있다. 더욱 불가사의한 것은 그 독서법이나 해석하는 방법이 천차만별이어서 백 사람이면  백 사람 모두 그 방법이 다르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책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구약성서라고 부르는 책은 본래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종교인 유대교의 경전으로 제정하였던 것이다. 성서의 기사 중 제일 오래된 것은 기원전 1100년경이며, 가장 최근의 것은 기원전 150년경에 기록되었다. 약 1천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걸친 책이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유대교의 경전으로 편성된 것은 기원 후 100년경의 일이다.

    유대인들은 구약을 하나님의 율법으로 받아들인다. 하나님과 유대인은 계약을 맺었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율법"이라는 형태로 주어졌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며, 그것으로부터 구원이 주어진다고 믿어 왔다. 이처럼 유대인은 구약성서를 하나님의 명령, 생활의 규범으로 받아들인다.

    신약성서는 어떤 책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둘러싸고 생겨난 문서로서, 주후 50년경에서 100년경에 걸쳐서 기록된 것이다. 유대교 편에서는 이 신약의 부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구약, 신약을 모두 경전으로 인정하고 있다. 

    본래 예수를 따르던 초대교인들은 소수의 유대인이었다. 그러다가 그들이 어느 단계에 이르러서 유대교를 떠나게 되는데, 이때 다른 것은 다 버리고 가면서 오직 하나, 경전을 가지고 간다. 왜 이들은 경전만을 가지고 떠났는가? 

    유대교 후기와 신구약 중간기의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던 희망이 있었는데  그것은 "새 계약 백성의 출현" 이라는 사상이다. 에레미야와 이사야의 예언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요청에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백성으로서의 위치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호세아 역시 이스라엘의 처지를 자신의 자녀들의 이름을 통하여 표현했다. 로루하마: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 계집아이, 로암미: 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파기했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했다.

    그런데 신구약 중간기로 오면서 새 계약 백성이라는 사상이 팽배했으며, 자기들이야말로 새 계약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무리가 생겼다. 예레미야 31장 31절을 보면,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라는 말이 있는 데, 이것이 바로 새 언약, 즉 신약(新約)인 것이다. 따라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경전을 "신약"이라 부르게 되었고, 유대교에서 가져 온 경전은 구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7  

    이처럼 구약이니 신약이니 하는 이름을 붙인 것은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호칭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유대인이 맺은 계약을 옛 계약이라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계약을 성취시키고, 전 세계를 새롭게 구원 할 새로운 계약(신약)을 세웠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그 후에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왔다. 9세기에 로마 카톨릭교회(서방교회)와 희랍 정교회(동방교회)로, 16세기에는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주류가 되는 루터파 교회, 개혁파 교회, 뱁티스트(침례)파 교회로 나누어졌다. 그 후 영국의 종교개혁 결과로 성공회, 장로파 교회, 회중파 교회가 생겼다. 18세기 이후 메도디스파(감리교, 감독교회)가 생겼으며, 그 이후, 오순절 계통의 교회와 여러 교파가 발생하였다.

    이렇게 나누어진 교파는 각 교파 나름대로 성서에 대한 이해가 약간씩 다르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찾아 교회 문을 두드리게 될 때 교회의 가르치는 선생은 그 교회가 이해하는 가르침 즉 그 교파의 교리만을 전달해 주는 경우가 많아 열심 있는 신자들은 교리에 빠져 맹목적 신앙의 모습을 띄는 경우가 많다.(8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런 모순에서 벗어나고자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라면 모든 교회는 하나다 즉 그리스도의 교회다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각 교파마다 자신들이 만들고 제정한 교파의 법이 있고 때로는 이 법이 성서의 권위보다 더 높게 평가될 때가 있어 성서의 가르침은 허공에 뜬 이상에 불과한 경우가 있다. 이런 모순에서 벗어나고자 인간이 만든 모든 법보다는 성서로 돌아가자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운동이다.  즉 각 교리에 의해서 성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성서 그 자체를 보자는 것이다.

    성서 해석의 역사

    1)유대교에서 우리가 말하는 구약을 이해할 때 율법해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게 됨에 따라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해석과 설명이 필요하게 되었다.

    유대교의 율법교사들은 "미쉬나"라고 부르는 '규범'을 정했다. 이 미쉬나는 다시 주해나, 해설이 필요하게 되어 "게마라"라고 부르는 책이 나오게 된다. 그 후에 이 게마라에 유대교의 전승들이 첨가되었으며, 그 후 오랜 시간이 걸쳐 {탈무드}라고 무르는 방대한 책이 만들어지게 되었다(천명에 가까운 학자들의 의견이 종합된 것임). 이것은 유대교가 지켜야 될 절대적인 규범이 되었으며, 랍비들은 이를 여러 백성들에게 안내하고 쉬운 말로 적용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유대인의 성서해석은 탈무드라는 독특한 주해서에 고착되어 버렸다.

    2)유대교의 학자로 성서해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는 데 그 이름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이다. 그는 유대교 율법을 그리스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비유적인 해석을 취했다. 성서에는 숨겨진 의미가 있고 수(數)나 이름에도 비밀의 뜻이 있다고 했다. 또 하나님과 세계 사이에는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로고스가 매개자로 존재하고, 무한자와 유한자가 중재 역할을 한다고 했다. 필로의 이러한 사고는 그리스도교에서 환영을 받게 되어, 그 후 그리스도교적인 성서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3)주후 100년경 로마의 클레멘트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구약을 신약의 예고로 이해하여, 그리스도는 구약의 완성자라고 주장했다. 즉 구약을 그리스도교 문서로서의 자리를 차지하게 했다.

    4)오리게네스(185-254)는 성서해석법, 나아가서는 그리스도교 사상에 학문성을 부여하였다. 그가 속해 있는 알렉산드리아 학파 학자들에 의해서 그리스도교의 사상은 그리스의 철학과 어깨를 겨루는 높이까지 이르게 되었다. 오리게네스는 성서는 삼중의 의미를 지녔다고 했다. 마치 인간이 육체, 혼, 영이 구비된 것처럼(헬라적 구분법, 히브리 사고는 몸개념), 성서에도 문학적, 도덕적, 영적인, 세 의미가 있다고 함. 그리고 이 영적인 의미를 알려면, 비유적인 방법(알레고리적 해석방법)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그는 교회의 교리에 속박되지 않고, 성서의 말을 맹목적으로 문자대로 믿지도 않았고, 비이성적인 수용태도에 떨어지지 않으려는 해석법을 개척해 주었다.

    5)그 후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나 시리아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안디옥 학파가 생겨났다. 이것은 유대적인 영향을 강하게 받아 비유적인 해석법보다는 문학적, 역사적 연구에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성서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렇게 해서 가능한 한 성서의 본래적인 의미와 문학적인 의미를 탐색하려는 태도는 우연하게도 근대의 합리주의적인 성서 연구법과 흡사하다.

    이처럼 여러 각도에서 성서를 탐구해 왔었으나 이단 논쟁을 통하여 정통파 교회의 경향이 점차로 강화되면서 성서의 연구방법이 획일화되었다.

    6)어거스틴(354-430)은 고금을 통해 장대한 신학체계를 쌓아올린 사람이었다. 그는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구원사상을 정리해 놓았다. 타락한 인간은 인간의 조상 아담의 원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형벌에 처해지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한 긍휼로써 은총을 베풀어, 그리스도를 믿는 일정한 수의 사람을 구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교회를 통하여 달성될 것으로서, 그는 공교회(카톨릭)를 중심한 "하나님 나라" 사상을 구축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신학이 카톨릭 사상의 기준이 되어, 그 후 오랜 기간을 걸쳐 중세 그리스도교 문화의 이론적인 기둥이 되었다.

    어거스틴의 성서해석법은 이전부터 있었던 영적, 비유적인 방법에 의존했으나 객관성이 결여되었고, 상당한 착상이나 기지적인 면이 있었다. 교회의 교리에 적응시켜서 해석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궁색한 면도 있었다. 여기서부터 교회의 교리나 신학을 전제로 하여 성서를 해석하려는 전통이 시작되었다.

    7)16세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후에 교회의 전승적인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성서의 권위에 의한 구원을 믿으려는 프로테스탄트(개신교)가 생겼다. 이 때 학자들은 루터, 칼빈, 멜랑히톤, 쯔빙글리 등 종교개혁자들이었다.

    8)16세기-17세기의 전반에 걸쳐 개신교에서는 "성서영감설"이 뿌리를 내렸는데, 그것은 성서의 각 언어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기록되었다는 무오설을 주장하게 되었고 성서에 대한 비판을 완전히 봉쇄하였다.

    9)17세기 후반 계몽운동에 영향 받음

    계몽운동은 인간이 자신의 이성에 의하여, 자신의 힘으로 자기를 형성하려는 운동이다. 즉 휴머니즘에 의한 세속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이것은 중세의 신 중심의 교회 사회에서 180도 회전을 의미한다. 성서연구에 있어서도 당연히 교회에 의하여 규정된 교의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성서해석학이 탄생된다.

    10)18세기가 되면서 이 새로운 움직임은 독일의 관념론 철학계통의 역사철학에서 자극을 받아 역사적, 비평적, 또는 문헌적 연구가 성행되어, 성서 각 문서의 성립과정, 편집과정을 탐구하게 되었다.

    11)19세기 독일에서 종교사학파가 일어났다. 이것은 리츨(1822-89)의 제자들에게서 일어난 운동이었다. 리츨의 주장은 1)그리스도교는 구원의 종교로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 인격에 연유한다. 2)복음은 개인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문제삼는다. 3)이 하나님 나라는 종교와 도덕의 발전에 의하여, 이 지상에 실현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종교사학파 경향은, 초자연적 성서해석을 피하고,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하는 정통주의에서 이탈하고, 하나님의 형벌이나 구원이 경시되는 데로 기울어졌다.

    이때 학계에서는, 다른 종교에 대한 연구도 성행했고, 고고학상의 발견도 줄을 이었고, 일종의 학문적인 "종교학"이라는 새로운 학문분야도 연구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학문과의 교류는 종교사학파의 성서연구를 한층 유리하게 만들었고, 성서해석을 위해서는 새로운 자료가 수집되고, 언어학적, 고고학적, 사회학적, 비교 종교학적인 방법을 채용했다. 따라서 종래의 비유적, 전통적, 신학적인 방법에 구속되지 않고, 전혀 새로운 성서연구가 시작되었다. 당연히 종래의 성서학과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이러한 논쟁으로 말미암아 학문의 발달은 촉진되었다.(9

    12)20세기, 성서해석학이 정립되고 발전되었던 시기이다.

    지금까지의 해석방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약에 국한하지만 신약에도 적용된다.

    (1)원전 비평 연구 (Textual Criticism). 성경은 최초의 원본이 없고 사본들만 있기 때문에 사본을 중심으로 본문을 비교 연구한다.

    (2)역사적. 문학적 연구(Historical and Literary Approach). 성서해석에서 말썽을 많이 가져 온 방법이다. 성서 자료를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거기에 따른 여러 가지 문학층을 찾아내어서 여러 자료들을 밝혀낸다. 모세오경의 네 가지 자료설(J.E.D.P)이 이런 방법에서 나오게 된다.

    (3)종교사적 연구(Religio-Historical Study). 종교, 문화적인 연구이다. 구약이 탄생한 팔레스틴 이스라엘만 아니라, 고대근동세계 전체의 종교적인 맥락에서 어떻게 구약종교가 발전하고 형성되었는가 하는 것을 연구한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종교사적인 접근 방법은 큰 공헌을 하였다.

    (4)성서고고학(Biblical Archaeology). 성서의 사실을 고증해내는 데 공헌을 했지만 성서 고고학의 약점은 영적인 세계를 찾아내고, 신학적인 문제를 다루는 데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5)양식사적 연구(Form-Critical Study). 양식사적 비평연구는 문학적 유형과 형식을 찾아 저자의 신학적인 의도를 찾아내기 위한 방법이다. 시편의 문학적 유형 분류가 독일 학자 H. Gunkel에 의해서 알려졌다.

    (6)신학적 해석(Theological Interpretation). 2,3,4,5에서 미비한 신학적인 해석을 재건해야 한다는 점에서 발달되었다. 지식은 많아도 신앙이 약화되기 때문에 신학적 해석이 이를 보안한다.

    (7)전승사적 해석(Tradition Historical Study). 신학적 해석 방법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창조전승, 족장전승, 출애굽전승, 여호수아전승 등이 전승 이야기로서 이야기 전체가 어떤 신학적 의미를 보여 주는가 하는 점에서 전승사적 연구방법은 우리의 구약성서 신학을 수립하고 하나님 말씀을 바로 해석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8) 편집사적 연구(Redactional Criticism). 성서는 적어도 1,000년 간의 문학 형성 과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최초는 기원전 9세기부터 기원 후 1세기까지 기록되고 편집이 되고 끝으로 정경(Canon)이 될 때까지 1,000년 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방법은 편집자가 어떠한 신학적 의도와 사관을 가지고 자기가 좋아하는 내용을 편집해서 성경을 만들어냈는가를 연구하는 것이다.

    (9)수사학적 연구(Rhetorical Criticism). 성서를 기록한 사람이 어떠한 수사 용어를 좋아하고 활용하는가 하는 것을 비평 연구하는 것이다.

    (10)구조적 연구(Structural Criticism). 문학적 구조, 예를 들어 시편 탄원시의 구조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11)정경적 연구(Canonical Criticism).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또는 정경으로 되었는가 하는 정경화 과정을 연구하는 것으로 예일대학의 차일즈(Childs)교수에 의해서 크게 발전되었다.

    (12)사회학적 연구(Sociological Study). 최근의 연구방향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회학의 연구 방법을 이용하여 연구한다. 정치신학, 민중신학 등이 성경을 사회. 경제적으로 연구한 시도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성서를 자주 접하게 되는 장소는 교회이며, 주로 성경공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성경공부는 믿음을 전제하여 교리와 전통에 순응하는 학습이다. 그러나 성서연구는 이성의 수단을 동원하여 구약성서라는 책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과 이스라엘의 신앙을 과학적으로, 객관적으로, 학문적 방법론을 동원해서 탐구해 나가는 학문이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이며, 또 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올바르게 믿는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책이다. 참으로 인간이 만든 종교서적 중에서 구약성서와 같은 책은 둘도 없다고 하겠다.


    5. 구약 성경의 구조

    구약의 명칭. 구약(舊約)이란 말은 옛언약이다. 이 말은 신약을 전제로 사용된 말이다. 신약이란 새로운 언약이란 말로서 구약의 예레미야서에서 유래되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언약 을 세우리라"(에레미야 31:31). 새언약이란 말은 신언약이며 여기에서 신약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이렇게 본다면 구약과 신약은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구약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약이 있을 수 있으며 신약을 통해서 구약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구약이란 말은 본래 히브리어(Hebrew)로 "하 세파림"이라고 불렸다. 그 뜻은 "그 책들"(the books) 이다. 그리고 히브리어 성경이 희랍어로 번역될 때도 "ta biblia"(the books)가 되었으며, 이 이름이 라틴어를 거쳐 오늘날 성경 전체를 가르키는 영어의 "Bible"이 되었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 쓸 때는 Old Testament, New Testament가 된다.

    구약의 구조. 구약은 전통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5경(五經, Torah, Pentateuch) - 모세 율법서라고 불리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다.

    (2)예언서(預言書, Neviim, Prophets) - 전기예언서와 후기예언서로 다시 분류된다. 전기예언서는 오늘날 역사서로 취급되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이다.(10  후기예언서는 3개의 대예언서와 12개의 소예언서가 포함된다.

    (3)성문서(聖文書, Kethuvim, Writings) - 위에 해당되지 않는 나머지 부분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개신교 성경은 70인역의 순서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1)오경

    (2)역사서

    (3)시가 문학서

    (3)예언서


    6. 구약성서는 어떻게 기록되었는가? : (구전과 문서)

    아주 오래 전에는 구약이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39권이라는 아주 귀중한 구약성서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옛날과 오늘날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제일 먼저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그 뜻을 선택한 인간에게 나타내셨으며, 언약을 맺으셨으며, 이런 이야기들이 후손들에게 구전으로 전해졌으며, 이런 일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누군가에 의해서 쓰여졌으며, 이런 과정 흐름 속에는 각 시대별로 사람들의 저작 활동이 활발하여 여러 가지 기록과 책들(하나님과는 관계가 먼, 혹은 가깝지만 인정될 수 없는 것들을 포함하여)이 만들어 졌으며, 39권보다 더 많은 책들 중에서 39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였으며, 책들의 배열이 여러 차례 바뀌었을 것이며, 원래 쓰여진 언어에서 다른 나라 말로 번역되었을 것이며, 인쇄술의 발달로 많은 양의 책이 만들어졌을 것이며, 그 책들 중 하나를 우리가 가지게 된 것이다.

    구전 : 니베르그(Nyberg)는 전승들이 근동에서 대부분 구전(口傳)으로 전해 내려오고. 문서로는 드물다고 주장한다.. 기록된 문학작품은 길거나 짧은 구전의 시대를 거친 것이며, 문학작품이 나온 뒤에도 표준적인 전승의 형태는 잘 보존되었다고 본다. 기록된 문서로서 구약성서는 포로 되기 이전에는 대부분 구전으로 보존되었으며, 포로 후기에 글로 남길 필요성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다.(11 구전이라는 독특한 형태가 선조들의 신앙고백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구전이라고 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구전의 형태와 내용은 모두 성서에 기록된 구전의 내용들이다. 말은 구전자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에서 잊혀지기 시작해서 그것을 들은 사람들에게서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로 잊혀지기 때문이다. 한가지 주의 할 점은 고대 근동의 구전 문화와 성서에 나타난 구전을 모두 같다고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서 작업

    그러나 모든 구약의 내용이 다 구전으로 만 전해 온 것은 아니다. 구전이라는 형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문서로 기록된 것이 있었다.(12  포로이전 시대에 구약성서에서 언급되는 '문서'‘두루마리' '낭독'라는 단어들은 이미 그 시대에 문서가 있었음을 알려준다(예: 신 8:14 소년의 기록, 왕하 22:8 율법책 발견).

    구전으로 내려오는 경우도 있었으며, 문서로 내려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어느 시기에 와서 구전이 글로 옮기어졌다. 그 시기를 대부분의 학자들은 포로기 전후로 보고있다. 나라의 멸망과 함께 수난과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이스라엘은 포로지에서 더 이상 구전의 형태로 신앙고백의 전수가 어려운 환경에서 글로 옮겨 보존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13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문학의 전체가 아니다. 다만 거룩하게 수집된 문서들이다. 약 1천년동안 여러 방언을 사용하는 지역들에서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문서들은 여러 번 수정되었고, 아람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편집하였다.(14


    7. 구약의 정경화 작업

    구약성서는 여러 낱권의 책들이 한 데 모여서 이룩된 39권의 정경이다.(15 39권은 여러 책들 중에서 권위가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되는 책들 만 모은 것이다. 이렇게 권위를 인정받은 책을 정경이라고 부른다. 정경이란 말은 영어로 Canon이라고 한다. 이 말은 히브리어 카네(qaneh)에서 나온 말이다. "카네"란 곧은 막대기, 곧은 갈대라는 뜻이다. 이 말은 희랍어 카논(Kanon)으로 번역되었으며 그 말의 뜻도 단순한 막대기 이상의 무엇을 재고 측량하는 자, 기준, 표준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 이유는 갈대가 척도를 재는 도구로 고대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캐논이라는 말은 다른 것과 비교해서 모범이 되고 표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신학에서는 정경(正經)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정경의 개념이 최초로 성서에 적용된 예는 고대 역사가 요세퍼스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주전 100년경에 이미 구약성서는 22권으로 책으로 결정되어 있었으며 정경이 될 수 있었던 그 책들은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1)영감으로 기록된 것으로 모세 때부터 아닥사스다1세(주전465-424)까지 나타났던 것에만 국한한다.

    2)저속한 세속문학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작품.

    3)그 책들은 수에 있어서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4)그 책들에 나타난 낱말들은 고쳐질 수 없는 신성 불가침의 성격을 지녔다.

    주후 1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제2에스드라서 14장 18-48절은 정경화 작업이 포로기의 지도자 에스라에 의해서 이룩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구약성서 중에는 에스라 이후에도 생겨난 것이 있으니 이와 같은 결론은 맞지 않는다. 그러나 2세기의 기독교는 위의 사실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

    정경화 작업은 오랜 역사적 발전과정을 걸쳐서 서서히 진행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역사적 발전과정에는 1)자료의 보존, 2)전달자료의 편집, 3)정경화 작업이 있었다.

    구약은 세 단계의 정경화 작업이 있었다.

    1)맨 처음 율법이 성서로 인정되었다-주전 400년경.

    2)다음은 예언서-주전 200년경.

    3)그 다음으로는 많은 분량의 성문서가 인정되었다-주후 90년 얌니아 회의.(16 

    거룩한 책들이 히브리어 경전으로 분류되어 구체화 된 것은 기독교 이전의 오랜 세월 동안에 계속 진행된 일이다. 정경화 작업은 일단의 취미에 의해서 되어진 일이 아닌 그 시대의 신앙고백과 매우 복잡한 단계를 걸쳐 이루어진 일이다. 구약의 정경은 다른 위경이나 외경과 비교해 볼 때 그 가치가 충분히 인정되고 있다(역사 의식이나, 표현 기술, 문체 등에서 뚜렷하게 구별 됨).

    유대교식 성경 분류

    a. 토라(오경)=1.창세기 2.출애굽기 3레위기 4민수기 5신명기

    b. 네비임(예언서)=6.여호수아 7.사사기 8.사무엘 9.열왕기 10.이사야 11.예레미야 12.에스겔 13.12소예언서

    c. 케투빔(성문서)=14.시편 15.욥기 16.잠언 17.룻기 18.아가. 19.전도서 20.애가 21.에스더 22. 다니엘. 23. 에스라-느헤미야 24 역대기.

    기독교식 성경분류

    a. 율법서(오경) =1창세기 2.출애굽기 3레위기 4민수기 5신명기

    b.역사서 =6.여호수아 7.사사기 8.룻기 9.사무엘상 10.사무엘하 11.열왕기상 12.열왕기하 13.역대상 14.역대하 15.에스라 16.느헤미야 17.에스더

    c. 시가서= 18.욥기 19.시편 20.잠언 21.전도서 22.아가

    d. 예언서(선지서) = 23.이사야 24.예레미야 25.애가 26.에스겔 27.다니엘(대예언서) 28.호세아 29.요엘 30.아모스 31.오바댜 32.요나 33.미가 34.나훔 35.하박국 36.스바냐 37.학개 38.스가랴 39.말라기

    외경

    히브리 정경 24권에 포함되지 않는 15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책들은 거의 B.C. 200-50년 사이에 기록 된 책들이 많다. 우리는 위에서 B.C. 200년경에 예언서가 경정으로 인정받았음을 알았다. 따라서 B.C. 200 이후에서 성문서가 정경으로 인정받은 A.D. 90년경까지는 이미 위의 책들이 저술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는 책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책들이 15권으로 한정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희랍시대 때 주로 외국에 흩어져 살던 히브리어를 모르는 유대인들에게 성경을 읽힐 목적에서 히브리어에서 희랍어로 성경을 번역한 일이 있었다. 이것을 70인역 이라고 부른다. 이 번역 때 지금 외경으로 불리는 15권의 책들도 함께 번역되었다. 그 후 A.D. 90년경에 얌니아에서 정경화 작업이 있을 때 15권의 책은 누락되었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교는 A.D. 90년 이전에 성립되었으며 그 당시 희랍어로 된 구약성경을 읽었기 때문에 지금은 외경이 된 15권이 포함된 70인역을 받아들였다. 그 후 이러한 전통은 로마교회로 이어져 왔다. 그런데 종교개혁 시대에 마틴 루터는 정경문제에서 70인역을 버리고 A.D. 90년경 인정된 팔레스틴 정경을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루터는 그의 독일어 성서 번역본에 15권의 책을 번역본 말미에 추가시켜 외경이라고 불렀으며 읽기에 유익한 책으로 분류시켰다. 그 후에 개신교는 이 전통에 따라 부록으로 취급하거나 제외 시켰다. 이런 결과로 인하여 개신교의 구약 성경의 특징은 내용은 히브리 정경을 따랐으며, 책의 순서와 배열은 그 당시까지의 전통인 70인역을 따랐다.

    이런 영향력에 따라 카톨릭 교회는 트렌트 종교회의(1545~1563)에서 70인역을 고수 할 것을 재확인하였지만 에스드라서상권과 하권, 그리고 므낫세의 기도 등 3권은 제외 시켰다. 따라서 오늘날 카톨릭 교회는 우리가 외경으로 취급한 15권의 책 중 위의 세 권이 제외된 12권을 포함하여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다.(17

    외경 15권은 다음과 같다.

    에스드라상. 유대민족의 포로기와 포로귀환의 이야기이다. 요시야 왕 때 있었던 유월절 행사에서 시작되어 포로귀환 후 에스라의 율법 낭독으로 끝나고 있다. 따라서 내용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의 내용이 겹치고 있다. 역사서에 해당되며 기록 연대는 기원 전 150년경으로 본다.

    에스드라하. 묵시문학으로 분류되며 내용은 바벨론 포로기 때 에스라에게 임했던 일곱 계시를 묘사하고 있다. 기록연대는 기원 후 70-135년경.

    토비트. 유대 청년 토비트가 살만에셀(B.C. 721년)에 의해 니느웨에 포로로 잡혀가서 당한 사건을 기록한 책이다. 기록연대 B.C. 250-175년경으로 본다.

    유딧. 앗수르의 침공 때 유대 과부 유딧이 배반을 가장하여 적의 진지로 들어가 앗수르 장군을 암살하고 도시를 건져냈다는 이야기이다. 기록연대는 B.C. 175-110년경으로 본다.

    에스더 부록. 2세기경 헬라어로 에스더를 번역할 때 그 끝 부분에 107절의 내용을 첨가해 놓은 것이다. 내용은 하나님, 기도, 신앙, 헌신, 경건 등이다. B.C. 180-145년경 기록한 것이다.

    솔로몬 지혜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했던 유대인에 의해 편집된 책으로 그 당시 이집트와 헬라 지역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 이방 풍습에 젖어서 신앙을 저버리지 않게 하기 위한 신앙의 권면서이다. B.C. 150-A.D. 40년 경 기록

    집회서(시락의 자손 예수의 지혜서). 잠언과 같이 삶의 다양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외경 중 제일 긴 책이며 윤리적 교훈서이다. B.C. 190년경 기록.

    바룩. 포로된 유대인의 기도와 회개 및 회복의 약속이 담긴 책이다. 기록연대는 B.C. 200-A.D.70년경으로 봄

    에레미야 서신. 에레미야가 바벨론 포로에게 보내는 서신형태로 되어있다. B.C. 317년경 기록.

    아사랴의 기도와 세 청년의 노래(다니엘 부록서). 다니엘서 3:23과 3:24사이에 삽입시킨 책으로 내용은 다니엘의 세 친구가 격렬한 풀무불 가운데서 드린 기도와 그 구원 사건 및 하나님께 대한 찬송을 기록하고 있다. B.C. 163경에 기록한 것으로 본다.

    수산나(다니엘 부록서). B.C. 100년경에 기록한 책으로 바벨론 포로 시대에 수산나라는 정숙한 연인에게 다가온 어려움을 기도를 통해 극복하고 있는 내용이다.

    벨과 뱀(다니엘 부록서). 바벨론 포로 당시 다니엘의 지혜로서 바벨론의 두 우상 벨과 뱀을 쳐부수는 내용이다. B.C.150-100년경 기록.

    므낫세의 기도. 유다의 왕 므낫세가 바벨론에 잡혀가 그곳에서 자신의 통치 기간 중 저지른 우상숭배에 대한 죄를 회개하는 내용이다. B.C. 150-50년경 기록.

    마카비상. 헬라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시리아의 왕에 있을 때부터 유대 마카비가의 시몬이 세상을 떠난 때까지의 유대 역사의 기록이다. B.C.103-63년경에 기록.

    마카비하. 마카비가의 유대 독립 운동의 공을 높이 평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찬송하는 글이다. B.C.100년경의 기록으로 본다.

    다음은 위경에 대하여 설명한다.

    위경은 외경과 마찬 가지로 B.C. 200년 이후에 쓰여진 책들이며 A.D. 200년경까지 쓰여진 많은 유대 문헌들을 포함한다. 이들 중에는 단편과 제목만 알려진 것도 있다. 그 내용으로는 묵시, 전승, 시가, 지혜들이다. 위경이라는 헬라어는 에피그라파로서 어원적으로 '가짜표제'란 뜻이며(제목) 내용상으로 '허구의 인물의 이름으로 기록된 문헌들'이란 뜻을 가진다. 그러나 모든 가명의 책이 다 위경은 아니다.

    외경에 해당되는 책들은 다음과 같다.

    (에녹, 모세의 승천, 바룩의 묵시, 이사야의 순교와 승천, 아담과 하와의 생애, 열두족장의 언약, 요벨서, 솔로몬 시편, 욥의 유언, 예언자들의 생애,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희년, 시빌라, 마카비3서, 마카비4서, 에녹2서, 바룩3서, 아세낫의 기도,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훈련교법서, 다메섹문서, 빛의 아들들과의 전쟁, 감사 찬송 등)

    구약 사본과 역본

    1)성서는 토판이 아닌 두루마리에 기록되었다(애굽에서 수입된 파피루스로 만든). 그리고 그 원어는 히브리어이다. 히브리어는 원래 모음(母音)이 없이 22개의 자음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구약 성경도 히브리 자음으로 기록되었다.(18 자음으로 쓰여진 히브리어 원문 성경에 모음부호를 붙인 것은 A.D. 5세기 이후이며, 맛소라 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서였다.

    2)마소라 학파. 마소라 학파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는 주후 5세기-6세기 초이다. 마소라는 히브리어 "마사르"(전달되다)에서 유래되었다(본문을 전달시키는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이 마소라 학자들의 의해서 모음이 붙여진 히브리어 성경을 "마소라 성경"(Masoretic Text, 약칭 M.T.)이라고 부른다.

    3)사해 사본. 구약 성경의 원문이 보존 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유대 서기관 및 랍비들에 의해 아주 엄격하고 세밀하게 만들어진 필사본들이 남아있다. 원본은 세월이 흐르면서 너무 낡아져 읽기 어려워지면 폐기시켰다. 그 사본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사해사본이다. 사해사본의 연대는 주전 1세기에서 주후1세기 사이이다. 현재 이스라엘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19

    4)레닌그라드 사본. 구약 전체가 보존된 최고의 사본은 "레닌그라드 사본"(Codex Leningrad)이다. 이 사본의 완성은 주후 1008년에 완성된 것으로 히브리 원문성경의 토대가 되고 있다. 러시아의 레닌그라드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약의 역본 (譯本, Version)

    1)70인역

    번역 역사상 가장 고대의 작품이다. 히브리어 구약을 희랍어로 번역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역본이라고도 불린다. 이 역본은 애굽 왕 톨레미 2세의 명으로 70(또는 72)명의 유대인 학자들에 의해서 구약이 희랍어로 번역되었다. 이러한 전승에 따라 70인역(LXX)이라고 불린다. 그 시기는 B.C.250-150년경이며 장소는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이다. 희랍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을 위한 번역이다.

    2)탈굼

    탈굼(히브리어로 번역이라는 뜻이다). 아람어로 번역된 구약성서를 말한다. 유대인들의 포로기 이후 언어는 아람어가 사용되었고, 히브리어는 예배의 용어로만 사용되었다. 따라서 예배 때 사용되는 히브리어를 아람어로 해설 할 필요성이 있었다.

    3)수리아역 페시타

    주후 2세기 경 구약은 수리아(시리아)어로 번역되었다. 주석적 성격을 지닌 번역이며 페시타(Peshitta)라 부른다. 팔레스틴 북부 시리아 지역의 기독교인들을 위한 번역이다. 시리아어도 일종의 아람어로서 아람어 탈굼과 여러 가지 동일한 특징을 지닌다.

    4)벌게이트 역

    구약의 번역 중 70인역 다음으로 영향력이 있는 역본은 라틴어 번역인 "벌게이트"(Vulgate)이다. 이 번역은 제롬(Jerome, A.D.342-419)에 의해서 410년경 완성되었다. 벌게이트 역은 오늘날까지도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구약성경이다.

    5)종교개혁시대 루터의 번역

    루터는 개혁 당시 독일어로 구약을 번역하였다(1534).

    6)영어번역

    14세기 위크리프(John Wycliffe)가 벌게이트 역을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1380년대). 이것을 효시로 해서 1520년대 틴테일(William Tyndale)이 히브리 원문에서 영어로 번역하였다. 그 다음 역사적으로 유명한 "흠정역"(King James Version 약칭 K.J.V.)은 1611년에 출판되었다. 오늘날 영어번역으로 가장 권위가 있는 것은 "개정 표준판 번역"(Revised Standard Version 약칭 R.S.V)이다.

    구약의 영감론

    영감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데오프뉴스토스'로서 하나님을 뜻하는 '데오스'와 숨쉬다, 불다의 뜻인 '프네오'가 합성된 형용사로 '하나님의 입김이 쐬인'이란 뜻이다. 따라서 영감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성경을 기록하실 때 그를 감독시키시며, 그의 인격을 주관하시어 성경을 올바로 기록하게 하신 것을 말한다.

    1)기계적 영감설

    성경기자의 정신활동이 완전히 중단된 상태에서 수동적인 자세로 하나님의 영이 불러주신 것을 기계적으로 그대로 받아썼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성경을 잘 살펴보면 성경기자의 독특한 문체와 개인적인 경험들이 풍부한 것으로 보아 너무 극단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2)역동적 영감설

    성경기자에게 영감을 불어 주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기존의 다양한 자료들을 배경으로 성경을 기록했다는 주장이다.

    3)유기적 영감설

    하나님의 영이 성경기자들을 감동시켜 각 개인의 재능 및 경험 등을 유기적으로 사용하여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각 기자의 모든 기록 부분에서 감독하였기 때문에 성경은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보수주의가 택하는 대표적 성서 영감론이다.

    제2장 오경

    1. 오경이란(Pentateuch)

    성서의 처음 다섯 책을 가르키는 말이다(창,출,레,민,신). 다섯 권으로 구성된 편집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구약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내용이다(차원 높은 종교적, 도덕적 규범과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있음). 창,출,레,민,신은 율법(Tdrah), 율법서로 일컬어 졌으며, 히브리어로 오경을 토라라고 부른다. 토라는 흔히 "율법"이라고 번역되지만 본래의 뜻은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그 내용은 태초(천지창조)부터 주전 1400(모세 죽음까지)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중심 주제는 율법 및 유대인과 창조주시며 구원자시고 인도자이신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이다. 이 율법들은 수천 년동안 이스라엘 백성 및 많은 민족들의 신앙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2. 저자 문제

    유대교 전통과 초기 기독교 전통에서는 모세가 오경의 저자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현대 보수수의 학자들 역시 모세의 저작설을 주장한다. 증거로는 1)오경 안에서의 증거(출 17:14, 24:4, 34:27  민 17:2, 33:2 신 6:9, 24:1-3등). 2)예수님의 증언 (눅 24:27)이다. 따라서 오경 안에 기록 된 짧은 소개문이나 연결문을 추가한 것 외에는 모두 모세가 기록한 것으로 본다.

    모세의 저작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오경에 대한 집중적 연구 결과를 토대로 모세 적작설을 부인한다. 오경은 어느 한사람의 저작이 아니며, 오경을 전체적으로 볼 때 그 안에는 현저한 통일성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부적인 면에서 다양성이 나타나는 것을 지적한다. 후대의 편집자 또는 편집학파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으로 본다.

    3. 오경의 구조

    오경은 창조기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역사(창조설화), 족장전승, 출애굽 전승, 광야전승, 시내산 전승. (오경) +가나안 정착 전승(육경) 이 포함되어 있다. 주축을 이룬 전승은 출애굽전승으로서 족장전승은 출애굽 설명을 위해, 광야전승은 출애굽의 노정기이며, 시내산 전승(종교적 관점에서)에서 첨가된 것으로 본다.

    1)원역사(창 1-11장)-4개 사건 (창조, 타락, 홍수, 각민족의 시작)

    2)족장사(창 12-50장)-4대 족장(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3)출애굽(출1-40장)-(1)출애굽(1-18장), (2)광야의 언약(19-40장-율법수여)

    4)제사법(레1-27장)-(1)희생(1-17장), (2)성결(18-27장-제사장 기능 강조)

    5)인구조사(민1-36장)-(1)1차조사 및 광야생활 규례(1-25장), (2)2차 조사 및 가나안 정착 규례(26-36장)

    6)모세의 메시지(신1-34장)-(1)메시지의 서론(1-11장), (2)신명기 법전(12-26장), (3)끝맺는 메시지(27-30장), (4)오경의 결론(31-34장)

    4. 원역사(Primeval history)

    창세기 1장부터 11장의 기록을 원역사라고 부른다. 12장부터 시작되는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기에 앞서 천지창조부터 인류전체의 범세계적인 역사를 기록하며, 초기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발전했었나를 설명하고 있다.

    1)천지창조, 성경은 세상의 처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세상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하나님의 창조에 의하여 존재(有)하게 되었으며, 창세기에서는 그 과정을 육일 동안의 창조와 제칠일의 안식으로서 설명하고 있다. 사람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모든 피조물들보다 훨씬 뛰어난 창조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아울러 이 세상을 다스리는 권한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것이다(창1:28). 현대의 교육이 진화론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면서 창세기의 천지창조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했지만 진화론은 세상의 시작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창세기를 읽게되면 적어도 세상의 시작과 인간의 존재 그리고 죄의 문제까지 소상하게 설명 받게 된다. 천지창조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첫째 날 - 빛(창1:3-5)

    (2)둘째 날 - 창공(궁창, 창1:6-8)

    (3)셋째 날 - 바다, 땅 식물(창1:9-13)

    (4)넷째 날 - 해와 달, 별 (창1:14-19)

    (5)다섯째 날 - 조류와 어류(창1:20-23)

    (6)여섯째 날 - 땅의 동물과 사람(창1:24-31, 2:4-7)

    (7)일곱째 날 - 안식(창2:1-3)         

    2)인간 타락(창3:1-24)

    인간에게 죄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성경의 대답은 창조 후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명령한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가 이를 어기고 따먹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죄를 범하게 되는 과정에서 사단(마귀)의 역할은 유혹하는 자로 등장하며 그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인간이 그 속임수에 넘어갔다고 한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서 추방당하며 남자는 노동을 여자는 해산을 해야하는 고통을 겪게되었다. 우리는 인간타락의 기사를 읽으면서 왜 인간은 죽음을 경험해야 하는 존재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온 것은 죄 때문이며 그 죄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시작되었으며 결국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하지 않는데서 비롯된다고 보고 있다.

    3)홍수이야기

    창세기 6장 이하에서는 인간의 타락과 부패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인간세상을 심판하기로 작정하고 홍수를 일으키신다. 이때 의로운 사람 노아는 방주를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되고 그의 자손들은 열국의 조상이 된다. 홍수 이후의 역사는 노아의 네 아들 중 셈의 후손들에게 초점이 좁혀지고 있다.

    5. 이스라엘 족장사(창12-50장)

    이스라엘 족장사는 셈의 후손 중 우르 출신 집안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 거할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삭 , 그리고 야곱으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한 가정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이스라엘의 기원이 있으며, 단지 한 가정의 역사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이스라엘 민족의 서론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계약을 맺으신다. 계약의 내용은 첫째 땅에 대한 약속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그 땅을 그의 자손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두 번째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크게 번성하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약속은 노년에 얻는 아들 이삭에게 이어지고, 이삭이 낳은 에서와 야곱중 야곱에게 이어진다. 이스라엘은 옛부터 12지파 중심의 민족이었다. 바로 이 12지파의 조상이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서 비롯되고 있다.

    1)르우벤, 2)시므온, 3)레위, 4)유다, 5)단, 6)납달리, 7)갓, 8)아셀, 9)잇사갈, 10)스불론, 11)요셉, 12)벤야민.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가고 우여곡절 끝에 그곳에서 총리의 자리를 얻게 된다. 이런 결과로 인하여 야곱의 일가족은 애굽땅 고센지방에서 정착하게 된다.

    6. 출애굽

    이스라엘에게서 출애굽은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그들이 출애굽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통하여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의미는 이스라엘 전체가 출애굽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즉 공동체의 구심점과 신앙의 뿌리에 해당되는 하나님의 임재와 실재를 경험한 것이다.

    창세기의 마지막 50장에는 요셉과 야곱의 만남,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 애굽땅에 정착하게 된 동기가 밝혀져 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난 출애굽기의 모습은 고센지방을 중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세력이 크게 번성하였으며, 애굽의 왕실은 이들의 존재를 두려워 한 나머지 노예로 삼았다. 이들은 노예가 되어 애굽의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의 건축에 강제 노동을 하게된다(출1:12). 이런 고통 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며 하나님은 모세라는 인물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킨다. 출애굽은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 유월절의 사건,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 등의 과정을 걸쳐서 이루어진다.

    출애굽 사건의 구체적인 시기는 당시 애굽 왕 라메세스 2세(Rameses Ⅱ,1290-1224)때로 보여진다.

    7. 시내산 계약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탈출한 지 3개월만에 시내산에 도착한다. 이 시내산에 머무는 동안 오늘날 십계명이라고 불리는 계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약"의 관계로 이해하였으며 이곳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시내산 계약이다. 시내산 계약의 특징은 한마디로 쌍무적(雙務的)이라는 데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서로간의 조건을 잘 지켜야 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또한 그 효력이 계속 유효하기 위해서는 십계명을 포함한 계명을 잘 지켜 행하여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그 어떤 어려움에서도 도와 주시며 구원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것을 어기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도 사라지게 된다.

    십계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인류역사상 사람들은 많은 신들을 섬기며 살아왔다. 그 대상이 바다, 태양, 동굴, 돌, 바람, 그리고 각 민족의 여러 신들이다. 그러나 제1계명에서는 이것들을 인정하지 말며 오직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요구하신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사람을 그분의 형상대로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유일신 사상이 여기에서 출발하고 있다.

    제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습을 어떤 형상에 한정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또한 다른 신의 형상을 섬기는 것도 원하지 않으신다.

    제3계명 : "너는 너의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이름은 예배와 찬양의 대상으로만 불려 져야 하며 인간의 그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어 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두 가지로 불리워 진다. 하나는 보통 명사인 "하나님"(God)이다. 히브리어로는 엘로힘(Elohim)이다. 다음은 고유명사로서 4개의 자음글자이다(YHWH). 사람들은 제3계명에 의하여 성경에 YHWH가 나오면 그 이름 대신 "아도나이"(Adonay, 주님이라는 뜻)라고 읽었다. 그리고 후대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YHWH에 대입하여 "여호와"라고 불렀다. 그러나 연구결과 YHWH의 원래 발음은 아도나이가 아닌 Yahweh로 밝혀져 야훼라고 부른다.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6일간의 창조와 제7일의 안식을 통하여 인간에게 안식을 허락하신 계명이다.

    제5계명:"네 부모를 공경하라."

    자녀들의 의무를 알려주는 계명이다. 구약에서는 부모에게 저주나 구타하는 자는 사형이라는 무거운 벌을 주었다.

    제6계명: "살인하지 말찌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질서를 위한 하나의 계율로서 생명에 대한 권한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계명이다.

    제7계명: "간음하지 말찌니라."

    성의 순결을 강조하는 계명이다.

    제8계명: "도적질하지 말찌니라."

    노동을 통하여 소득을 얻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제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거짓 증거를 하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거짓 증거는 참을 거짓으로 규정하고 거짓을 참으로 왜곡하는 시키므로 공동체의 질서에 있어서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제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이미 남의 소유가 된 것에 대하여 욕심을 갖지 말라는 말이다. 즉 타인의 소유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계명이다.

    십계명은 단지 열 가지의 계명이지만 오경 안에는 수많은 율법과 규례와 가르침이 있다. 이것을 토라라고 부른다. 전통적으로 이 가르침들은 모두 613개라고 인정하고 있으며 이것을 간추리고 요약한 것이 바로 십계명이라 할 수 있다.

    8. 신명기

    구약 39권 가운데 이스라엘의 신앙과 사상을 대표할 수 있는 책을 하나 선택한다면 신명기를 들 수 있다. 신명기는 신학적으로 그 중심점과 맥을 가지고 있다.

    모세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전진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세 번의 설교를 한 기록이 바로 신명기로서 그 동안(약40년)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후 시내산을 거쳐 광야의 생활을 하며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고 이제는 요단강 동편 모압 평지에서 모세의 당부(설교)를 듣고 있는 것이다.

    사경(Tetrateuch): 마틴 노트는 여호수와부터 열왕기는 신명기에 나타난 신학적 입장으로 쓰여진 역사서이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종전의 오경에 속하는 신명기가 신명기 사가의 작품에 속하여서 오경이 아니라 사경이라는 것이다.

    육경(Hexateuch): 창세기~여호수아까지를 일련의 구도로 보고 하나의 단위라는 주장이다. 그 이유는 창세기로부터 시작되는 이스라엘 민족형성 역사에 관한 성서 이야기는, 이스라엘조상들에게 준 민족형성에 관한 야훼 하나님의 "약속"이 가나안 땅 정착이라는 신의 약속의 "성취"를 향하여 나아가는 한 역사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의 약속의 성취"는 구원사의 결론이 나타나는 책이 결코 다섯 번째의 신명기가 아니고 여섯 번째의 책, 여호수아서이기 때문이다(여호수아 21:45). 따라서 여호수아 역시 육경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경은 약속-성취라는 구원사의 맥락에서 볼 때 일종의 미완성 된 책으로 볼 수 있다(폰 라트의 주장).

    9. 역사 비평의 이해

    두 종류의 천지창조 이야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장엄하고도 당당한 필치이다

    창세기는 천지의 유래, 인간, 민족, 언어, 예술 등의 유래들을 서술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을 목적한다. 즉 목적이 있는 책이다. 천지 창조를 읽을때 우리는 자연과학적 사실이냐 아니냐는 물음을 접어두고 왜 이렇게 기록하고 있느냐?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1:1-2:4a 과 2:4b - 25 절은 서로 다른 창조이야기이다.20

    1장의 뉘앙스는 아주 무게 있고 또 정신성을 깊이 간직한 문장이며, 문구(날짜)가 반복되며, 간결하다. 2장의 뉘앙스는 일반 대화적인 말로서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왜 창조이야기가 서로 다르며, 차이가 있는가? 그 이유는 기록되던 시대와 그 환경이 서로 차이가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

    1장은 주전 55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본다. 즉 그 시기는 바벨론의 포로생활기간으로 민족적인 위험의 시기였다. 이러한 중에 몇몇 종교가들의 손으로 특별한 문서가 저작되었다. 창세기의 첫 부분은 이러한 문서이다. 그 저작자들을 제사장들로 규정하고 기호를 붙여 P(Priest)문서 라고 부른다. 이름대로 제사적인 색채가 강하며, 제의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 있고, 연대 숫자 계보를 많이 다루고 있다. 신의 절대성, 초월성이 강조된 것으로 보아 유대교가 이미 많이 발전하였던 시기로 본다.

    2장은 주전 850년경 남왕국에서 기술된 J문서에 속한다. J라 부르는 이유는 신의 이름을 야훼, 여호와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다음의 연대표는 기억하는 것이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1800년 - 아브라함 족장 시대,

    1275년 - 모세의 출애굽, 

    1020년 - 사울

    1000년 - 다윗

    922년 - 남왕국 북왕국 분열

    850년 - J문서 저작

    722년 - 북왕국 앗수르에게 멸망

    587년 - 남왕국 바벨론에게 멸망.

    550년 - P문서 저작

    538년 - 포로귀환

    이상에 보는 것과 같이 P와 J의 연대 차이는 300년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멸망이전과 이후라는 크나큰 상황이 변화가 배경이 된다.

    J문서가 저작된 주전 850년경은 다윗과 솔로몬의 정치적 안정으로 야훼신앙이 정착된 때이다. J기자는 그 이전부터 구전으로 내려오는 역사관에 의하여 J문서를 편집했다. 즉 야훼 하나님을 믿는 백성은 축복을 받고, 신앙을 배반하는 백성은 망하게 된다는 역사관이다.

    P문서가 저작된 550년경은 전후(戰後) 문서로서 모든 것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난 다음 고통 속에서 다시 살아 보려는 희망을 모색한 유대인의 정신성이 배경이 된다. 전쟁에 지고 포로의 상황에서 J기자처럼 역사를 볼 수가 없다. 절망의 일보 직전에서 깊은 반성을 통하여 이제는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창세기 편집자는 P문서의 창조담을 앞에 놓고, 그 다음에 J문서의 창조담을 이어 놓는다. 두 창조담은 결국 인간에게 집중되도록 되었다.

    족장 설화

    창 12-50장까지 족장시대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의 형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 아브라함의 우르에서 가나안으로의 이주를 설명하고 있다.

    족장은 유목민의 최고 연장자가 해당된다. 부권사회이며, 족장시대의 엘신의 등장이 등장하고 있다(출6:3, 창16:13).

    이것은 성서의 백성인 히브리 사람에게는 엘신을 숭배하는 계열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J문서에서 하나님을 야훼라고 부르는 데 비해 여기서는 "엘"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엘"계통의 또다른 문서가 있었을 것을 생각 할 수 있다. 그것을 바로 E문서라고 부른다.

    E문서는 750년경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기록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북이스라엘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특징으로 신명을 엘로힘으로 부른다. 그리고 J와 달리 신을 인격화하지 않고, 대신에 신은 꿈이나 천사 등을 통하여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표현했다. 윤리적인 데 관심을 가졌다. 종교의식에도 관심이 있다. 히브리 사람에게 신의 역사가 강하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믿고있다. 따라서 기적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유감스러운 것은 E문서가 저작된 지 얼마 안되어 북이스라엘이 722년, 앗수르에게 망하고 만다. 그래서 북쪽 지파의 10부족이 포로로 끌려간다. 이때 E문서가 남왕국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측한다. 그리고 얼마 후 남왕국 유다에서 J와 E가 어떤 편집자에 의해서 합해진 것으로 생각한다.

    850년 - J문서 (남왕국에서)

    750년 - E문서 (북왕국에서)

    650년 - J + E 편집

    550년 - P문서 저작

    이 편집자는 남왕국 사람이기 때문에 E보다는 J문서에 더 치중한 것으로 본다. J문서에다 E문서를 이어주거나 아니면 중요한 것이 파손되지 않도록 합쳐놓기도 했다. 그래서 이 둘은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리고 시대적으로 오경의 기록이 배경이 되기 때문에 역사 비평학자들은 오경에서 J, E, D, P문서 연구를 집중하고 있다.

    연구 역사

    1)연구 시도

    비터(H.B Witter, 독일인, 목사)는 1711년 그의 저서에서 창세기의 두 가지 신명을 자료구분으로 기준 삼을 것을 주장했다(Elohim, Jehovah,혹은 Yahweh).

    프랑스 의사 장 아스뜨륙(Jean Astruc, 1684-1766) - 1753년 두개의 자료와 열두 가지 부차자료 구별하였다.

    2)초기 문서 가설

    1780년경 아이히호른(J. C. Eichhorn,1752-1827)-아스뜨륙의 의견 확대하여 엘로힘 및 야훼의 신명에 따라 기사들을 구분하였다.

    3)단편설

    겟데스(A. Geddes, 1737-1802) - 오경은 솔로몬 시대를 전후하여 많은 문서들이 결합되었으며, 이들 문서들은 J 와 E의 두 집단에서 유래된 것으로 단편적 문서들의 수집으로 본다. 즉 단편들이 계속 편집되고 연결되어 오경 전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19세기 초, 파테르 (J. S. Vater) - 오경이 신명기를 핵심으로 39개의 독립적인 단편으로 구성되었다고 본다.

    4) 보충설 -1830년 히브리어 학자 에발트(Ewald, 1805-75)

    오경은 핵심자료인 E에다 J가 보충되었다고 주장한다.

    5) 후기문서 가설

    1853년 흡펠트(H. Hupeld) - 보충설을 거부하였다. 본래 3개의 독립적인 자료가 있었다고 본다. 문서의 순서는 P.E.J.D순으로 본다.

    6) 문서설의 전환 : 19세기 헤겔의 역사철학인 정반합 이론이 적용 되면서 변화를 가져왔다.

    로이스(Reuss 1804-1891)와 파트케(Vatke) - 제사법전(P)이 가장 후대의 것이다고 주장하며, 그 이유는 P문서가 복잡한 형태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라프(Graf)-로이스의 제자로 로이스의 주장을 발전시켜 구약 율법(오경)은 단순한 것에서 부터 복잡한 것으로 움직인다고 주장한다.

    벨하우젠(Juius Wellhausen 1844-1918) - 그라프의 학설을 보편화 시켰다. 이때부터 자료설이 일반적인 학설로 인정받았다(JEDP설).

    7)최근의 동향

    헤르만 궁켈(Herman Gunkal)과 그레스만(Gressmann).

    개별적 문서들의 특징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결론을 짓고, 문서 이전 단계 파악하여 구전의 성장과 그 생활 환경, 종교적 환경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삶의 자리, Sitz im Leben).

    오경은 어떤 저자의 고의적 작품이 아니라 고대의 전통적인 일반자료들을 수집한 것이다고 본다.

    폰 라트( G. vonRad). 오경이 아닌 육경이 하나의 문학 단위로 결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구원사의 입장에서(가나안이 목표이기 때문) 고대의 신앙고백이 오경의 구조적인 개요를 마련했다고 본다. 그러나 신앙고백을 재구성하기 위해 사용한 모든 본문들은 현재형태로 볼 때 매우 늦은 시기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고백들이 오경의 최종적 형태의 근간이 되는 뼈대를 마련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노트 (M. Noth) - 육경이 아니라 사경이라고 주장한다.

    J와 E를 하나의 공통적 기반으로서 합쳐 그들을 G문서라고 부르고 있다. 국가 형성이전에 이스라엘이 열두 부족동맹으로서 존재했으며 그 안에서 독립적인 주제들이 결합되어 G가 부족동맹의 서사시를 형성했다는 주장이다.

    8)결론

    가. 지금까지 지지 받던 문서설(JEDP)이 도전을 받고 흔들리고 있다.

    1) A. C. 슈미트, R. 렌트로프의 견해

    슈미트 : JEP의 역사서로 이루어졌다는 전통적 견해 지지하면서 동시에 방대한 양의 편집층이 첨가된 것으로 본다. J. E의 연대를 휠씬 후대의 것으로 보며, 원역사, 족장사, 출애굽 역사 등 오경의 주요 전승군이 포로이전에 이미 형성된 것으로 본다. J의 연대를 기존에는 10-8세기로 잡아왔다. 그러나 J기사와 신명기 역사가 매우 유사하다고 여긴다.

    예) 사사기 도식

    백성들의 불순종 - 야훼의 진노 - 백성들의 부르짖음 - 구원

    민11:1-2, 21:4 이하의 도식이 위의 도식과 같다.

    출15:22-25a, 17:1b-7절 역시 비슷하다. 따라서 슈미트는 J의 연대를 신명기 사가의 연대와 동일하게 본다. 이런 견해에 대한 문제점은 일부 후기의 기록들 때문에 전체를 신명기 사가의 연대와 동일하게 보는 것은 무리이다.

    R. 렌트로프 : 오경의 전승군들, 즉 원역사, 족장사, 이집트 체류, 출애굽 사건, 광야 방황, 땅점령 전승들은 본래 서로 횡적인 연결이 없는 독립 전승군들 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종전의 JEDP의 편집을 부정하고 대신에 각 전승군들로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편집자라는 용어 보다는 수집자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고 본다.21

    이처럼 지금까지 인정해 오던 문서설에 어려움과 문제점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나. 공인된 최종적 형태의 본문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대한 새로운 관심이 대두되었다.

    이 연구 방법은 신문학비평이다. 현대구조주의 영향을 받아, 방법론적인 도구들을 위한 언어학과 기호학과 같은 분야들을 강조한다. 성서에 대한 신학적 이해보다 앞서서 성서를 끝까지 읽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통독하는 것은 전체를 읽고 정리하는 단순한 작업이다. 오늘날 구조주의와 언어과학이 발달하면서 심각하게 반성하는 것 중 하나는 전통적인 독서 방법이다.

    구조주의적 방법에서는 성서 본문 구조를 관찰, 성서 본문 자체가 표면적으로 나타내는 신학적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성서 저자가 "무엇을 말했는가"에서 본문이 "지금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22

    제3장 역사서

    이스라엘 역사에는 두 가지 종류의 기록이 있다. 하나는 신명기 역사(Deuteronomistic History)이며, 다른 하나는 역대기 역사(Chronicler's History)이다. 그러나 이 역사를 기록한 사람이 정확하게 누구이지를 알 수가 없다. 다만 이들 역사가의 이름을 우리는 신명기 역사가, 역대기 역사가라고 부른다.

    A. 신명기 역사

    신명기 역사서에 포함되는 책은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 사무엘 하, 열왕기 상, 열왕기 하이다. 신명기 역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신명기서의 중심사상을 근거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1. 신명기 사가에 대한 일반적 이해

    신명기사가(Deuteronomistic)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구약의 2대 역사가, 즉 신명기사가와 역대기 사가 중 하나이다. 신명기사가의 역사서술의 의도는 자기 민족이 멸망한 후 포로가 된 암울한 시기에, 자신들의 비극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혀내고 그래서 자기 민족의 미래, 즉 이스라엘의 "평화를 여는 시도"로 기록된 것이다.

    마틴 노트는 처음으로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 하, 열왕기 상, 하를 신명기 역사가의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신명기의 율법과 언어, 사상이 유사하고 교훈적인 말들도 유사한 점이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1)복잡하지 않고 기교가 없으며 정교하지 않다(언어의 특징: 구약에서 가장 쉬운 언어이다).

    2)역사의 주요시점마다 중요인물을 내세운다(신-모세. 여호수아-여호수아. 사사기-각 사사들. 삼상하-사울, 사무엘, 다윗. 열왕기- 솔로몬).

    3)주요시점에서 과거 미래를 상세히 서술하는 특징이 있다.

    4)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할 것을 강조한다(반복적으로 요구한다).

    단순한 편집이 아니고 계획적인 작품이다. 즉 신학적인 의도를 가진다.

    결론적으로 신명기사가는 편집자일 뿐만 아니라 한 역사작품의 저자이다. 전승 받은 자료를 계획적으로 편집했다.

    1943년에 간행된 마틴 노트의 저서에서 그는 신명기 역사서들이 바벨론 침입으로 인한 유대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파괴, 그 후 포로기의 암담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사에 대한 재해석의 작업으로서 이루어진 저작이라고 주장하였다. 노트의 이론은 신명기로부터 열왕기까지의 저작들이 이스라엘 멸망을 과거를 통해 설명하려는 목적을 지닌 단일 저자에 의해 기록된 저서라고 보며, 그는 이 역사서를 신명기적 역사서라고 부른다.

    2. 신명기 역사서의 구조 및 내용

    구조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1)원신명기에 서론 부분이 첨가되었다(신1-3장).

    2)여호수아서 부분으로 가나안 정복과 야훼의 계약성취로 나타난다.

    3)왕국시대 이전에 겪었던 어려움이 기록되어 있다(사사들의 활동). 왕국의 기원을 추적할 수 있다.

    4)왕조발생과 성장의 부분이다(삼상7장-왕상8장).

    5)분열왕국 시작과 쇠퇴하는 왕국에 되한 부분이다.

    기간은 모세시대에서 바벨론 포로까지 약 700년 동안의 역사이다.

    내용 - 이스라엘 역사 속에 현존하시는 야훼

    1)모세를 통해 야훼의 존재가 전달된다(신1:1-삿2:10).

    모세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점령을 위한 준비를 한다(신1:1-32:52).

    모세가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정착을 통해 이 축복이 성취된다(신33:1-수21:45).

    여호수아의 마지막 연설, 계약체결, 가나안인과의 공존(수21:1-삿2:10).

    2)야훼의 존재는 이스라엘의 주권자로서이다(삿2:11-삼상12:25).

    이스라엘은 야훼의 부름을 받은 사사를 둔다(삿2:11-8:35).

    이스라엘은 스스로 세운 왕을 둔다(삿9:1-52).

    이스라엘은 야훼의 부름을 받은 사사들의 치리(삿10:1-삼상12:25).

    3)야훼의 존재와 이스라엘의 왕(삼상13:1-왕하25:30).

    사울의 등극(삼상13:1-삼하1:27).

    다윗과 솔로몬의 등극(삼하2:1- 왕상11:43).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국(왕상12:1-25:30).

    3. 신명기(Deuteronomy) 신학

    신명기 역사 안에 나타나는 구원도식은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의 범죄 - 하나님의 심판 - 백성들의 회개 - 하나님의 구원

    네 가지 사상은 신명기 역사가의 역사관을 이룬다. 그리고 이 역사관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간섭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신명기사가의 작품의 연대는 대체적으로 신명기책은 주전 7세기 후반에, 그리고 여호수아-열왕기는 요시아의 종교개혁 이후에 시작된 일차 편집작업에 이어 바벨론 포로기의 이차 편집 작업에 의해 현재의 형태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B.C. 621년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받고 그러한 신앙적인 관점에서 그때까지 전승되어 오던 오경을 기초로 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썼다.

    신학적 의도

    1)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멸망과 포로유배에 대한 일련의 대재앙들에 대해 신명기 역사가는 하나님의 백성의 존재와 운명에 대한 해답을 주어야 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의 과거역사는 하나님께 대한 계속된 배신의 역사였고 결국에는 계속된 불순종에 대한 심판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국가적인 재난은 이스라엘이 죄를 지은 것 때문이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강조되고 있다.

    2)토라에 대한 순종과 실천에 대한 강조

    토라에 대한 모든 준수는 율법적인 계명에 대한 실천의 문제를 넘어서서 이방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유일신 신앙에 대한 강조이다.

    이스라엘은 야훼만을 따르고 섬겼는지 아닌지, 또한 왕이 야훼께 그 마음을 바쳤는지의 여부에 대하여 몇세기 동안 시험을 겪었다. 시험에서 얻은 결과는 사사시대나 왕정시대나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 부정적이다.

    특히 제의적 잘못에 대한 부분이 크게 부각된다. 이방신 숭배에 따른 제1, 2 계명의 위반은 이스라엘 전체의 구원과 멸망에 대한 기준이 되고 있다.

    3)심판의 선포와 회개의 촉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예언의 선포

    신명기 사가는 예언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성격으로 구분한다.

    (1)재앙의 선포

    신명기 역사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결과로 예언자를 통하여 재앙을 선포하고 있다. 재앙의 모습은 이방인에 의한 남북왕국의 멸망이다(왕하17:2, 왕하24:2, 20:12, 21:10, 22:16, 23:27). 신명기 역사서 안에 자주 등장하는 야훼의 종으로서의 예언자는 재앙과 심판에 대하여 선포한다(왕하 17:23, 21:10).

    (2)회개의 촉구

    왕하 17:13은 특별히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한 훈계의 예언적 메시지이다. 따라서 예언자의 역할은 훈계를 통해 회개를 촉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3)미래에 대한 예언 선포

    이 부분은 특히 미래의 희망에 대한 메시지이다(왕상 8:46, 왕하8:57등).

    4. 신명기 역사서 이해

    여호수아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 계속하여 모세의 지도 아래 광야의 여정을 보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때 모세는 그의 모든 권한을 여호수아에게 맡기고 자신은 요단강 동편에 남게된다. 여호수아서는 모세로 부터 영도권을 부여받은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지역의 정착지 확보하는 과정을 기록한 글이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점령하기 이전에, 사해 남쪽에는 에돔 왕국이 수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요단강 동편에는 모압, 시혼, 암몬, 옥등의 왕국들이 있었다. 요단 서편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중앙 정부 없이 도시 국가 형태로 살아가고 있었다.

    여호수아서는 1장에서 12장에 요단 서편를 점령하는 기록이 있다. 먼저는 서편의 중앙지대를 점령하고(여리고, 아이등) 다음에는 남부 지역인 기브온, 아모리 족속과의 전투, 마지막에는 북부지방(가나안 북부, 갈릴리 호수 북쪽의 하솔)에 대한 점령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13장에서 22장까지는 각 지파에게 영토를 분할하는 내용이 나오고, 마지막 23장에서 24장에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이 세겜에 모여서 그들의 신앙을 다짐하는 예배를 드린다.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그들이 가나안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힘과 용기가 아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 주셨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했던 땅에 대한 성취가 여호수아서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이 주신 법(율법)과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와 함께 힘찬 첫 출발을 시작하였다.

    사사기

    여호수아가 죽은 뒤 이스라엘은 지도자가 없는 기간을 갖게된다. 주위에는 가나안 사람들의 침투가 있었으며 이를 해결할 인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여호수아 이후부터 왕국이 수립되기 전까지 이스라엘을 이끌어간 지도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이름을 "사사"라고 부른다. 사사기 2장 16절에는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셨다고 하였다. 즉 사사는 왕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세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Charisma)을 받았고 그 직분은 혈통으로 계승될 수 없었다. 이들은 왕권을 소유한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전시에는 싸움을 이끈 전쟁의 지도자였고, 평소에는 고향에서 사람들 사이의 중재를 맡는 판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사시대에는 중앙 집권적인 정치권력이 없었으므로, 따라서 정규군도 존재하지 않았고 유사시에는 12지파에서 민병이 출동하여 이를 막아내곤 하였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는 이러한 체제가 위협을 받게되는데 주로 블레셋의 공격 때문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왕정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초대왕으로 사울을 택하게 된다. 왕조 이전에 이들이 다스린 시대를 사사시대라고 부르며 그 기간은 왕조가 수립 때까지 약 200년 동안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4단계가 반복되는 과정이다.

    제1단계 - 이스라엘의 범죄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사사기3:7)

    제2단계 - 하나님의 심판(징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포타미아의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년을 섬겼더니"(3:8)

    제3단계 - 이스라엘의 회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매"(3:9a)

    제4단계 -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웃니엘이라"(3:9b)

    이처럼 4단계의 과정이 사사시대에 반복적으로 나타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만을 섬기지 않고 때로는 이방의 신을 섬기며 하나님을 멀리한 결과라고 신명기 사가는 기록하고 있다.

    사무엘 상, 하

    사무엘은 이스라엘 사사 중에 마지막 사람이었다. 사무엘 상하가 그의 이름에서 연유되어 표제가 되었지만 사무엘이 사무엘서 전체를 기록한 것은 아니다. 다만 왕조 초기에 블레셋과의 갈등 속에서 열두 지파를 연합시키고 왕정이 출발하는 데 필요한 사울이라는 인물을 발견하고 그에게 기름부은 지도자였다. 사무엘에 의해서 선택된 사람은 사울이며 그는 블레셋 사람과 싸워 그들을 서쪽으로 몰아내고 암몬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동쪽으로 몰아내는 유능함을 보여 주었다.(1 그는 외부의 적들을 제압하는 데는 인정을 받았지만 내부의 통치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사울의 왕국이 아직은 과도기적 성격이 뚜렷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각 지파들은 아직까지도 중앙집권적이 아닌 지파동맹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강력한 왕권을 수립하기까지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따라서 그가 수도로 정한 기브아는 왕궁에 해당할 만한 커다란 궁궐도 없었으며 관료제도나 행정조직도 발달하지 못했다.

    사무엘 상하에서 집중점은 왕조의 발생과정과 초기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사울이 이스라엘 초대왕으로 등극한 것은 약 1020년경이며, 사울의 뒤를 이어 2대왕으로 등극한 사람은 다윗이다. 그는 사울과는 달리 왕조를 형성하였고 그의 왕조는 솔로몬을 이어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하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윗이 왕권을 수립한 후 다윗의 조정에서는 새로운 왕조신학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셨다는 내용이다(삼하23:5). 이것을 다윗 계약이라고 부른다. 다윗 계약의 내용은 첫째,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으며, 그에게 영원한 왕조를 약속해 주셨다는 것이다(삼하7:8-17). 둘째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라는 것이다(시132:13-14). 다윗 왕조의 수도 예루살렘을 중요시하고 있는 것이다.

    열왕기 상하

    다윗이 죽고 그 뒤를 그의 아들 솔로몬이 잇게 되는 데 열왕기의 내용은 솔로몬의 등극 과정과 그의 통치, 남북의 분열과 열왕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솔로몬의 업적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성전 건축이다. 그러나 그는 이웃나라와 경쟁으로 화려한 궁전을 건축하였고 여러 나라의 공주들과 정략결혼을 함으로 이방신 숭배 의식을 도입하게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는 궁궐의 막대한 예산을 꾸려가기 위하여 무거운 세금과 노동력을 부과하였다. 이런 결과로 인해 백성들의 불만은 고조되었으며, 급기야 북쪽의 열지파는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남북이 분열되고 말았다.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왕국을 수립한 후 단과 벧엘에 북왕국의 성전을 세웠다. 신명기사가는 이 행위를 북왕국이 저지른 죄 가운데 용서받지 못할 큰 죄로 보았다. 신명기에 규정한 "예배장소의 단일화" 원칙에 위배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신명기 사가는 계속적으로 북 이스라엘의 왕들을 평가하면서 북이스라엘에 대하여 부정적인 역사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국력을 비교해 보면 남유다보다 군사적으로, 경제력으로 우월하였다. 그렇지만 북이스라엘은 정신을 집중시킬 마땅한 신학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 역사는 반란과 혁명이 연속되어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하였다. 여로보암에서 마지막 왕 호세아에 이르기까지 19왕이 다스렸으나 오므리왕조와 예후 왕조만이 각각 4, 5대의 짧은 왕조를 형성했을 뿐이며 19명의 왕 중 8명이 암살되는 비운의 역사였다. 결국 북왕국은 건립 후 약200년 뒤인 호세아왕 때 앗수르의 살만에셀 5세에 의해서 멸망당했다(주전 722년).

    남쪽 유다는 르호보암의 중심으로 다윗의 왕조가 계속 지속되었다. 계속적으로 수도 예루살렘은 정치, 종교적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렇지만 다윗왕조가 백성들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는 그런 훌륭한 왕조는 아니었다. 남유다의 왕들 중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두 왕이 있다. 히스기야와 요시아이다.

    히스기야는 주전 715-687년에 통치한 왕으로 정치와 종교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먼저 정치개혁을 살펴보면, 유다는 북이스라엘의 멸망 후 앗수르의 침공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앗수르에 많은 조공을 받쳐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 정책에 대해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앗수르의 사르곤 대왕이 죽은 뒤 그 아들 산헤립이 즉위하자 이틈을 타서 바벨론에서 반기를 들었고, 블레셋, 모압, 에돔, 그리고 애굽이 반앗수르 정책을 취하였고 히스기야도 이 대열에 가담하여 그 동안 바쳐오던 조공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앗수르의 침공을 대비하여 요새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자주 독립정책은 산헤립의 보복적 침공으로 좌절된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다의 모든 성읍은 점령당하고 많은 공물을 받쳐야만 했다. 다음으로 종교개혁을 알아보면, 히스기야의 정치개혁은 실패로 끝났지만 정치개혁과 동시에 실시한 종교개혁은 앗수르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종교적인 물건들을 성전에서 제거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나안 토속종교의 산물인 산당, 주상, 아세라 목상 등을 제거하였다. 이때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던 구리뱀도 부수어 버렸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사실은 유월절 행사이다. 이 유월절 행사는 거국적으로 계획되었으며, 북이스라엘의 유민들도 초청하였다. 아무튼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실시한 히스기야의 개혁들은 박수를 보낼 만하다.

    요시아는 아몬의 아들로 아몬이 신하들에게 살해당한 후 겨우 여덟 살에 왕위에 올랐다. 히스기야의 뒤를 이은 므나쎄는 히스기야의 개혁을 모두 원점으로 돌려 놓았으며, 이러한 영향이 아몬에 이어 요시아에게 까지 미쳤다. 요시아는 기세가 꺾이는 앗수르의 모습을 보면서 사마리아와 므기또, 갈릴리 지방을 유다에 합병시켰다. 결국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함락되므로 요시아의 정치개혁은 비교적 성공할 수 있었다. 그의 정치개혁은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이때 성전을 수리하던 중 율법서가 발견되었다. 종교개혁은 이 율법서의 발견으로 더욱 활기를 띄었으며 율법서를 기준으로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만이 합법적인 성전이라는 정책으로 지방의 모든 성소는 폐지 시켰으며 앗수르의 모든 제의를 금지시켰다.

    이처럼 유다의 왕 중에 히스기야와 요시아는 비교적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지만 신명기 사가는 이들 역시 비판을 한다.

    결국 유다는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에게 멸망을 당해 종말을 고하게 된다(주전587년). 그러면 왜 유다는 멸망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유다왕들의 불순종이었다. 대표적으로 므낫세 왕은 우상숭배로 인하여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물리친 것과 같이 유다 역시 버리겠다고 한다(왕하23:26-27, 왕하 24:3-4). 신명기 사가는 북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에 대한 신학적인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열왕기의 기록은 포로로 잡혀온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중 옥에서 풀려 나오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왕하25:27-30).

    신명기의 역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정착생활을 하는 것에서 시작되어, 왕정이 수립되고, 분열되었으며, 두 왕국이 각각 멸망할 때까지를 기록하면서 이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를 기록 보존한다는 차원 이상의 것으로 신명기 사가는 신명기 역사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과거역사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속된 배신의 역사였고 결국에는 계속된 불순종에 대한 심판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B. 역대기 역사

    1. 일반적 이해

    역대기 사가(歷代記史家)의 역사서란 역대기상하, 에스라, 느헤미야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 역사서를 기록한 기자를 "역대기 사가"라고 부른다. 역대기 역사는 신명기 역사를 토대로 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재정리했다. 신명기 역사가와 역대기 역사가는 같은 시기(왕조역사)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서로 대조되는 입장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였고 따라서 두 역사가의 서로 다른 의도와 목적이 비교되면서 연구되어 왔다.

    신명기 역사서가 여호야긴의 석방 사건을 끝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역대기의 역사는 인류시초인 아담에서 부터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포로귀환 공동체 시대까지 기록하고 있다. 특히 포로귀환 이후 시대의 기록은 유대교 발생의 배경이 되기 때문에 중요시되고 있다.

    우리가 역대기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소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 공동체가 당면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70년 동안의 포로 생활이란 2세대에 걸친 오랜 세월이었고, 자연히 포로지에서 탄생한 2세나 3세들이 귀환 공동체의 대부분을 구성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예루살렘이라는 곳이 매우 낯선 고장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발생한 문제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남아있었던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바벨론에서도 순수한 야훼신앙을 지켰던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바벨론에서도 안식일과 회당제도를 통하여 순수한 야훼 신앙의 과거 전승을 되새겼던 것이다. 그들은 과거의 이스라엘 전승을 이어 받아서 그것을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문서화해서 가지고 온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세의 출애굽과 시내산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야훼종교라는 커다란 줄기를 이어받은 부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본토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소위 "땅의 백성들"이라 하여 그 곳에 남아 이방 종교와 타협하였다. 즉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없어지고 난 후의 70년이란 공백 기간 동안 그 땅을 지배하던 이방인들의 종교를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일제 신사참배와 비교).

    이런 상황 속에서 누가 진짜 유대인인가? 누가 진짜 순수한 하나님의 백성인가?의 문제가 제기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역대기 역사가의 대답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제시되었다.

    1)과거 솔로몬 성전의 예배 계승이다. - 스룹바벨의 제2성전은 규모, 규격, 예배순서가 솔로몬의 성전과 같다. 포로귀환 공동체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야훼 예배를 통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2)순수한 혈통을 찾는다. 바벨론에서 돌아 온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본토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잘못 되어 있다. 왜냐하면 본토에 남이 있던 사람들은 제사장까지도 그 땅을 지배하던 사람들과 피가 섞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스라-느헤미야서에는 개혁시 이방사람과 결혼했던 사람들은 제사장일지라도 파면시킨다. 즉 과거 전승의 연속과 순수한 혈통의 보존을 통해서 역대기 역사가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특히 역대기 기자는 다윗 통치에 대하여 가장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아담에서 사울까지 족보 역사를 역대상 1-9장에, 다윗 왕조를 10-29장까지 19장에 걸쳐 기록하고 있어서 다윗의 역사를 역대기 전체 분량의 3/1이나 차지하게 하고 있다.(1 역대기 사가가 다윗을 강조한 이유는 그의 독특한 신학에서 비롯되었기에 그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그가 그처럼 다윗을 강조해야만 했던 이유를 알아야 할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사무엘서를 대본으로 다윗의 일기를 기록할 때 다윗의 명예를 손상시킨다고 생각되는 곳은 모두 삭제한 것이다. 가령 사울의 죽음을 탄식하는 부분, 다윗과 사울왕가와의 분쟁, 다윗왕궁 내부의 암흑상, 그리고 밧세바의 사건이나 압살롬의 사건은 일언 반구하지 않는다. 그 대신 다윗과 그의 시대를 이상화했고, 다윗이 종교의식의 규정을 훌륭히 지켰고, 성전제도가 군주제의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긴 추가문을 수록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보아 "역대기" 저자는 후세의 유대교 확립 이후, 성전 제사장의 한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다윗은 이상적인 왕이며, 이상적인 시인이며, 이상적인 종교가로 추앙하게 되었고, 여기에 메시아 사상의 메시아의 원형으로 다윗을 부각시키게 된 것이다. 다윗이 메시아상까지 추앙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 유대인들은 다윗시대의 영광을 되찾아 본적이 없다. 다윗시대 때는 통일국가였으며, 주변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으며, 평화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독립국가 체제를 잃어버렸고 외국에게 지배당한 상태이며, 과거의 영광을 되돌아보던 시기이다. 그들에게는 언젠가 다윗과 같은 힘을 가진 메시아가 나타나, 외국을 섬멸하고, 신의 백성을 구출해 줄 것이 틀림없다고 믿는 것은 그들에게 당연한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다윗을 이상화하고, 메시아의 모습으로 다윗을 결부시키고 마침내는 다윗의 후손 중에서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메시아는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신앙도 생겼다.

    2. 역대기 저자 문제

    역대기 사가는 누구인가? 탈무드에서는 역대기의 저자를 에스라로 규정하고 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 에스라의 신분이 서기관으로 밝혀져 있다. 따라서 그가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후대에서는 에스라설을 부인하고 역대기 기자는 레위인으로서 제사적인 임무를 가지고 있던 성전 직원 중의 한사람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제사장보다는 레위인에게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는 다음과 같이 역대기의 저자가 요약된다.

    1)한사람이 전체를 다 기록하였다.

    2)저자는 두 사람이거나 한 학파이다

    3)역대기 역사서는 각각 그 저자가 다르다.

    3. 시대적 배경

    역대기 사가에 대한 시대적인 배경은 포로귀환 이후 시대이다. 즉 516년의 예루살렘 성전 건축 이후에서부터 그리스 제국의 확장시기까지이다.

    유다를 점령하고 포로를 끌고 갔던 바벨론은 주전 6세기(599-500) 초엽까지만 하여도 강력한 세력이었다. 그러나 페르샤의 고레스가 바벨론의 동편에 있는 메대와 페르샤 두 왕국을 하나로 병합하고 바벨론을 공격하고 드디어 주전 539년에 승리한다. 제국의 영역을 더 넓힌 고레스는 여러 민족의 고유한 관습과 종교를 신봉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유대민족은 따라서 포로귀환과 동시에 성전을 재건축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왕성하던 페르샤 제국도 어느듯 사양길에 접어들게 된다. 페르샤 대왕 다리오는 새 수도를 페르오폴리스에 세우고(페르샤만 바로 위쪽, 인도와 가까운 지역) 인도 서부 지역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513년 그리스 지역인 마케도니아를 정복하였지만 490년 마라톤에서 그리스 군에게 패배한다. 그 후 페르샤는 바다에서도 패배하였다(살라미스 해전). 그 후 페르샤와 그리스는 힘의 균형을 어느 정도 이루면서 다투었으나, 주전 333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게 패망한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상황 속에서 아직 까지 주권을 회복하지 못한 유대민족은 강대국의 이권 속에서 이리 저리 밀리는 신세가 되었다. 우선 페르샤 시대 때, 유대는 페르샤의 각 민족의 관습을 우대하는 식민지 정책에 힘입어 유다지역에 총독을 두고 자치 기구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미 자치기구를 인정받았던 사마리아가 유다지역을 계속적으로 예속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느헤미야 등은 유다지역을 독립적인 자치기구로 인정받기 위하여 노력한다.

    사상적인 면에서 유다지역은 페르샤의 멸망과 더불어 잘 발달한 헬라의 정치와 제우스신을 비롯한 다신론, 이원론등 철학(아리스토텔레스-알렉산더가 영향받음, 소크라테스등) 유입으로 야훼 유일신 사상이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문화적으로 페르시야 문화가 끝나고 희랍문화가 봇물 터지듯 휩쓸려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야훼종교의 전승을 이어갈 수 있느냐는 역대기 사가가 당면한 과제였다. 이것은 외부적인 어려움에 해당한다.

    그러나 외부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어려움도 있었다. 그것은 그토록 원하던 성전 재건이 이루어 졌는 데도 여전히 페르샤의 속국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조국에 대한 실망과 열등감이었다. 이런 어려움은 특히 제의 분야에서 더욱 고조되었다. 그 모든 이유가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제의 분야에서 타락이 초래되었고(말라기의 내용), 이런 타락은 유다전역에 걸쳐 악을 다스릴 수 있는 가치기준을 흐려지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역대기 기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빚어진 민족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재해석해 줄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역대기 역사를 기록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민족주의 역사가들이 일제 식민사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민족사관을 주장하였듯이 역대기 사가도 잘못된 의식을 바로잡기 위해서 유다의 멸망이나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됨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부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다윗왕 시절처럼 다시 한번 이스라엘의 부흥을 희망하였던 것이다.

    4. 자료

    역대기 사가는 대체로 현존하고 있는 자료들, 곧 신명기 역사서인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자신의 중요 대본으로 삼고 거기에 맞춰 따라가면서 자신의 역사서를 서술하였다.(2 그는 자신의 목적에 도움을 주는 자료를 선택하고 발췌하였으며,(3 신명기 역사서에 전혀 담지 않은 특수자료를 사용하기도 하였다.(4 그는 공문서, 전기, 실록, 제표 등의 문헌, 구전 및 예언집, 성전 및 관청의 서고 자료 등을 이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역대기 사가가 사용한 자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5

    1)사용한 자료의 이름을 분명히 말한 자료 (족보책, 역대지략)

    2)정경에서 온 자료

    3)느헤미야의 실록

    4)에스라의 보고문

    5)아람어로 된 자료

    6)명단록

    5. 역대기 역사의 구조

    1)아담에서 포로귀환민까지의 계보와 명단 : 역대상 1장-9장

    2)다윗의 통치 : 역대상 10장-29장

    3)솔로몬의 통치 : 역대하 1장-9장

    4)분열 왕국의 역사(남유다 중심으로) : 역대하 10장-36장

    5)제1차 포로귀환과 성전재건 : 에스라 1장-6장

    6)에스라의 귀환과 개혁 : 에스라 7장-10장

    7)느헤미야의 1차 개혁(성벽 재건) : 느헤미야 1장-12장

    8)느헤미야의 2차 개혁 : 느헤미야 13장

    6. 포로기

    바벨론에 의한 남유다의 멸망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함으로 이스라엘은 전 국토의 절반 이상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으며, 많은 사람이 포로로 끌려가고, 낯선 이방 민족이 들어와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하하였고 이 과정에서 지파동맹적 전통이 남왕국으로 대량 유입되었다.(6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초점이 남유다에 향하게 되었으며 모든 전통이 유다에 있었다. 그러나 남유다마저 바벨론에게 함락 당하자 이스라엘은 국가도, 주권도 없는 식민지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주권국가의 백성에서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되고 세 차례에 걸쳐(렘 52:28-30) 포로로 끌려갔는데 이때 포로로 유배당한 자는 비교적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었다.(7 그러나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역하 24:14) 여전히 팔레스틴에 남아 포도원을 가꾸고 농사를 지었다.

    앗수르나 바벨론은 팔레스틴을 정복하면서 지도층 인사와 유력한 사람을 강제로 이주시켰으며 요새화된 성읍을 철저히 파괴하였고(애가 2:2,5) 반대세력을 제거하였다.

    한편 바벨론으로 강제 이주된 사람들은 포로민으로서 특별한 고초를 겪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포로민이었다.(8 그들이 누리는 자유는 바벨론에 복종한 뒤에 얻어지는 것이며 대부분은 나라 잃은 설음과 분노로 살아갔다(시 137편).

    이 시기에 또 다른 특징은 바벨론 이외에도 다른 지역으로 유다 백성이 흩어져 갔다는 것이다.(9 다윗 왕조를 중심으로 모여 하나가 되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분열왕국을 거치더니 급기야는 타민족의 지배로 인해 그 구심점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국가로서 존립이 끝나고, 그 제도도 아무 가치가 없어졌다. 지금까지 지켜오던 제의도 지속될 수 없었다. 외부적으로 볼 때 모든 면에서 이스라엘은 하나의 국가로 볼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위기의 상황은 여러 번 반복되었다. 첫 번째는 광야의 시기이다. 이때는 주위의 환경이 너무 어려웠으므로 약속의 땅으로 간다는 희망이 약해져서 이스라엘은 유랑자의 모습이 되었다. 이 시기는 땅 없는 시기였고 그로 인해 그들에게는 생존권의 위협을 받는 시기였다. 이런 외부적인 조건으로 인해 그들이 약속의 땅으로 간다는 생각은 포기하거나 잊혀진 것이며 아울러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거나 망각한 것으로 나타난다. 신앙적인 위기 상태였던 것이다.

    두 번째 위기는 포로기였다. 이때도 물론 땅이 없는 시기였다. 이스라엘의 왕조시대는 야훼 하나님이 함께 동행한다는 신앙고백이 그들의 국력만큼이나 커지는 시대였다. 특히 다윗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 그들은 인접 국가들에게까지 야훼신의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 다윗 왕조의 깃발이 내려오고 그들은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춘 다른 나라들처럼 될 위험한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직접 겪은 어려움은 그들이 속한 땅을 떠나 바벨론으로 이주를 당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신분은 더 이상 자유민이 아니었고, 주권을 잃어버린 식민지 백성으로 그들의 생활 주거를 옮겨야 하는 처지였다.

    우리는 그 일행을 바벨론 포로라고 명명하지만 그 당시의 포로는 현대개념의 전쟁포로와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포로들의 생활 모습은 성경구절을 통하여 볼 때 바벨론 이주 후 감옥에 갇히거나 눈에 띄는 압제나 학대의 내용이 문서상에 나타나지 않는다.(10 그러나 그들은 그들에게 정체성과 안정을 가져다 주었던 곳으로부터 추방당한 상태에 있었다. 포로기 동안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과 생활에 활력을 불어 넣어준 삶의 모든 조건들과 형식들로부터 소외되었던 것이다.(11 이 시기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커다란 위기였다. 그것은 문화적인 면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화가 열악한 팔레스틴에서 비롯된 절제가 강조된 문화라면 바벨론은 그 반대로 팔레스틴지역보다는 풍부함에서 비롯된 문화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문화는 바벨론의 문화 속에 흡수되거나 사장되어 버릴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더구나 고대사회의 문화는 종교적 색채가 강했으며 이스라엘의 야훼사상이 바벨론의 종교들에 휩쓸려 그 정체성을 잃게 될 위험성이 짙었다. 이 위기는 유랑하던 광야시절 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P기자에 대하여

    사경(창, 출, 레 민)은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그 배후에는 수차에 걸친 편집단계가 이루었졌다고 보고 있다. 최종적인 편집은 , 유대 왕국이 망한 후, 바벨론 포로기 동안 사제(P기자)기자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으로 보고 있다.

    P기자에게는 또는 편집자들에게는 자신들이 물려받은 고유한 사제적 전승 자료들이 있었다. 특히 제의에 관한 제도나 규율에 관한 대부분의 자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사제들에 의해 발전되고 보존된 전승들이었다.

    P기자는 자신의 뚜렸한 신학적 견해와 의도를 가지고, 전승된 사제적 자료를 토대로 하여, 거기에 고대 전승자료(이미 J와 E가 합해져서 JE가 된 Old Epic Traditions)들을 첨가하여 신학적 저작을 형성하였다.

    P기자의 시대 구분( B. W. Anderson의 견해)

    1)창조의 단계로서, 하나님의 안식으로 종결된다.

    2)노아의 단계로서, 대홍수 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땅의 모든 생물들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신다. 하늘의 무지개는 이 노아계약의 표징이 된다(편무계약-일방적계약)

    3)아브라함 족장의 단계로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대대로의 후손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신다. 할례는 이 계약의 표징이다(창 15장, 자손번창과 땅 약속-편무계약). 인간에게는 책임이 없고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다.

    4)시내산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계시의 단계이다. 이때의 표징은 안식일이다. 이 시내산 계시의 특별한 의미는 하나님꼐서 계시하여 주신 것이다. 모세계약이라고 부른다(출19장-24장). 쌍방계약(하나님과 이스라엘)으로 만약(if)~계약을 지키면......, 으로 된 조건부 계약이다. 쌍무(방)계약은 이스라엘의 순종 여부에 따라 지속된다. 이 계약은 국가가 형성된 후에도 북쪽 이스라엘에서 신학적 주류를 이루었다.

    왜 P기자는 이와 같은 계약사상을 고취 시켰는가?

    P기자의 역사적 정황은 다음과 같다. 기원전 7세기 말에 바벨론 제국이 재기하더니 6세기 초에 그 힘이 남쪽 유다에 미치었고, 587년에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유다왕국은 종말을 보게 되었다. 이 때 이스라엘의 지도급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을 맛보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또한 신학적 위기였다.

    이때에는 남왕국을 지배하였던 다윗 계약 신학도 비운의 역사적 사실 앞에 흔들리게 되었다.

    다윗계약 이란, 하나님께서 다윗왕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셨다(삼하 23:5). 중심내용은 1)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시고 그 왕조의 영속을 약속하심. 2)시온의 성전을 그가 거하시는 성소로 택함(시78, 89, 132).

    이런 다윗 계약은 유대왕국의 멸망과 예루살렘이 초토화돠는 역사적 현실 앞에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할 필요성이 되었다. 이것은 메시아 기대 사상으로 발전되었다. 다윗계약에 의하면 여호와가 시온을 자기의 거처로 선택했다는 것과 다윗왕조가 영원히 통치하고 그 원수들에게서 승리하리라는 약속이 불변하다고 하였지만 역사적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여호와긴이 포로로 끌려와 바벨론 궁정에 있었지만 허수아비 같은 유다의 왕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거짓말쟁이인가? 이 물음에 선지자(특히 에레미야, 에스겔4-5장)들은 모세 계약의 특징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기에 내린 심판이다라고 해석하였다.

    모세계약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따라서 이스라엘의 전망도 암담하였다. 이때 P기자가 아브라함의 계약을 재발견하였던 것으로 본다. P기자의 신학을 정리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이스라엘의 불복종으로 말미암은 역사적 심판과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브라함 계약에 근거한 것으로 이스라엘의 불복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서약에 의하여 영구히 존속한다는 것이다. 이런 명백한 메시지를 이스라엘을 향해서 선포할 목적으로 붓을 들었던 것이다(자료 모우고 편집함).

    제4장 예언서

    A. 서론

    구약성서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책들, 즉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 살펴보려고 한다. 이 중에서 애가와 다니엘은 성문서를 연구할 때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나머지 모두는 15권의 책으로 예언서라고 부른다.

    예언서 중 이사야(66장), 예레미야(52장), 에스겔(48장)은 히브리어 사본에서 한 두루마리 전체의 공간을 필요로 하기에 충분한 길이가 된다. 그래서 이 세 권을 대예언서라고 부른다. 나머지 열두 권은 길이가 비교적 짧다. 열두 권 중 가장 긴 두 권은 호세아와 스가랴인데 모두 14장이다. 그리고 가장 짧은 장은 한 장으로 된 오바댜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 열두 권의 책을 소예언서라고 부른다.

    1. 예언자 이해

    구약성서 안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있다. 이들 예언자를 지칭하는 단어는 대표적으로 세 가지가 나타난다. '호제'(hoze), '로에'(roe), '나비'(nabi)이다.

    먼저, '호제'와 '로에'는 그 말뜻이 선견자로 번역될 수 있다. '로에'는 '본다'라는 뜻이며, '호제'는 '환상을 보다' '꿈을 꾸다'라는 말이다. 일차적인 뜻은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보는 사람을 지칭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나비(Navi 혹은 Nabi)'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카디안어의 나부(Nabu)와 어원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본다.(1 Nabu는 '부른다' '알린다'라는 뜻이 있다. 따라서 '나비'를 '부름 받은자' 혹은 '알리는 자'로 이해하고 있다.

    언어상으로 구약의 예언자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지만 출애굽기 7장 1절에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대신할 아론을 나비의 역할을 담당케 하신 곳에서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이 때의 나비는 대언자로 해석된다. 따라서 예언자는 미리 점치는 점성술이나, 복술의 의미보다는 하나님이 어느 사람에게 부탁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豫言者 보다는 預言者 이다.

    그들의 사명은 현재일이나 미래의 일이나 상관없이 하나님이 말하라고 명하고 위탁한고 맡긴 말씀을 전한다. 그것이 예언자의 사명이다. 즉 예언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들의 주된 임무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고해 주는 일만이 아니였다. 예언자들은 자기들이 처한 특정한 상황을 하나님과 같은 시각에서 그 상황을 보고 하나님의 판단을 선언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주로 한 일은 백성들이 잘못한 일로 인하여 파멸을 당하지 않도록 회개를 촉구한 것이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충실하게 지켜 진실된 삶을 살 것을 계속적으로 촉구하였다.(2

    구약의 예언자를 오늘 설교가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예언자들은 오늘날 어느 계층보다도 설교가들을 더 닮았다. 차이점으로는 1)교회를 가지고 있지 않다. 2)특정한 회중이 아닌 어쩌면 예언을 거부하는 무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3)교회 조직과 같은 조직에 얽매이지 않는다. 예배분위기 다른 환경에서 메시지를 전했다. 4)청중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청중을 찾아다니며 예언한다(시장어귀, 왕과 일대 일로 대면). 5)전달방법은 몇 마디 말, 글 등을 사용하여 전달하였다.

    2. 초기 예언자들

    역사서에 기록된 사람들이다.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등 비교적 이름이 알려진 예언자이다.

    나단은 다윗왕의 죄를 지적하고, 왕위 계승은 아도냐가 아닌 솔로몬이라고 예견하였다.

    아히야-여로보암 1세때 여로보암에게 나라를 분리하도록 자극을 준 사람이다.

    스마야-여로보암에게 군대를 일으키지 말라고 경고하고, 유다가 시삭을 침략을 받을 것을 예언하였다(왕상12:24, 대하12:8).

    예후-바사왕을 정죄하고 여호사밧 왕을 책망하여 여호사밧 왕의 통치에 대하여 기록을 남겼다(하나니의 아들).

    이름모를 예언자-아합왕이 외국과 동맹맺는 것을 책망하였다.

    미가야-길르앗 라못에 재앙이 있을 것을 예언한 이믈라의 아들이다.

    야하시엘-요호사밧에게 전쟁을 일으키도록 자극을 주었다.

    엘리에셀-여호사밧이 외국과 동맹을 맺는 것을 정죄하였다.

    이름모르는 젊은 예언자- 엘리사의 대리자로 예후를 왕으로 기름을 부었다.

    또한명의 이름 모르는 예언자- 아마샤왕이 용병을 사용한 데 대하여 책망하였다.

    이들 예언자들의 특징 중 첫째로는 끊임없이 공적인 일에 관심을 갖는다. 둘째는, 자기들 민족의 복리는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 하는 데 달려 있다고 믿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예언 운동의 시조라 할 만큼 예언자가 해야 할 기본적 사명을 보여주고 있다. 즉 예언자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구며 어떠한 분이냐 하는 신관의 문제를 분명히 가르치는 사람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행동해야 하느냐 하는 윤리의 문제를 올바르게 가르치는 사람이다. 또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서 어떤 역사적 사명을 가진 것인가 하는 민족 책임 문제를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사람이다.

    엘리야 이후 예언자들은 활동시대와 강조점은 서로 다르지만 공통점은 모두가 엘리야가 문제 삼고 중요시한 신앙의 문제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사마리아에서 예언한 것이 특징이다. 나머지는 남유다에서 예언을 했다.

    이사야와 미가는 주전 8세기 중반에서 말까지 유다가 번영하여, 도덕과 윤리가 부패하였을 때 활동했다.

    에레미야-두 사람보다 늦게 나타났다. 주전 7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서 바벨론 망하게 될때까지 예언 활동을 하였다.

    3. 문서 예언자들

    1)주전 8세기 예언자  

    아모스(주전 750), 호세아(주전 740), 이사야(주전 742-700),  미가(주전 722-701).

    2)주전 7세기 예언자

    나훔(주전 612), 스바냐(주전 628-622), 하박국(주전 605),   예레미야(626-587),

    3)포로기 예언자(587-538)

    에스겔(593-571), 제2이사야(540), 오바댜(포로기 중)

    4)포로기 이후(538년 이후)

    학개(520-515), 스가랴(520-515), 제3이사야((500), 요엘(500-350년 사이 중에), 요나(포로기 중), 말라기(500-450년 중에)

    예언자들은 1)이스라엘 신앙의 대변자이며, 2)민족의식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고 개혁하는 개혁자들이라 말할 수 있다.

    아모스는 정의를, 호세아는 사랑을, 이사야는 믿음을, 에레미야는 새 마음을 주장하였다. 이들 모두가 조국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 활동하였다.

    예언자들의 특징적 행위는 황홀경에 빠지고, 음악에 영향을 받고, 대중심리의 영향을 받는다. 때론 모든 긴장을 풀어 버리고 이상한 행동을 한다. 이사야는 나체로 예루살렘 거리를 뛰어 다녔으며 신도 신지 않았다(사 20장). 에레미야는 나무로 만든 멍에를 자기의 목에 매달고 돌아 다녔다(렘 27장). 떼를 지어 살기도 하였다. 이것을 예언자 학교라고 부른다. 그러나 모든 예언자가 다 모여 산 것은 아니다. 집에서, 성소에서, 왕궁에 속하여 예언한 자도 있었다.

    B. 주전 8세기 예언자

    1. 아모스

    구조. 아모스서는 8장으로 된 책이며, 네 부분으로 나뉜다.

    1-2장 : 세계 열국에 대한 탄핵(심판선언)

    3-장 :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선언

    7-장 10절 : 심판의 이상(5가지 환상)

    9장 11-15절 : 회복의 약속

    활동 연대.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때로 주전 750년경이다. 당시 남 유다에는 웃시아왕이 지배하고 있었다.

    아모스는 구약의 예언자들 중 특색 있는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문서 예언자(Writing Prophet)의 처음 사람이며, 12소선지자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가장 단기간(短期間)의 예언활동을 한 사람이다.

    아모스의 생애는 그의 고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목자요 뽕나무를 기르는 자"(7:14)라는 말을 통하여 그가 농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농부인 아모스를 불러 북이스라엘에게 예언하였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치리하에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정치적, 경제적, 군사력에서 이전의 왕들보다 단연 앞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부는 지배계급에 해당된 것이었으며, 가난한자와 힘이 없는 농촌의 농부들에게는 "가난한 자는 신 한 켤레에 팔렸고 농부들은 그 가족과 함께 팔렸다"는 9장 이하의 현실이 적용되었다. 그렇지만 부자들은 여름 피서지와 겨울 별장을 두었으며(6:4), 그 여인들은 절제함이 없이 낭비와 정숙하지 못한 행동을 하였다(4:1).

    메시지

    북왕국 이스라엘은 번영하는 모습 속에서 부패한 종교와 사회, 경제적 불평등이 팽배하였다. 이 때 아모스는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려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5:2)고 외치면서 정의의 하나님을 전하고 거룩하신 뜻을 따르라고 외쳤다. 그의 메시지의 중심은 "정의와 공도(公道)"였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5:24). 이 말은 그의 예언을 대표하는 말이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책임을 강조하였으며, 공동체의 사회정의의 실현을 강조하였다.

    2. 호세아

    구조.

    1)1-3장 :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

    2)4-9장 : 이스라엘의 죄와 책망

    3)10-14장 : 이스라엘의 죄의 역사와 하나님의 사랑

    활동 연대

    호세아는 아모스보다 약 5~10년 정도 후대인 주전 745년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메시지

    호세아가 활동하던 시대는 여로보암 2세가 죽은 뒤 정치적 안정기가 끝나고 극도의 혼란기였다. 우상은 나라 안에 가득하고(4:12이하, 7:1이하, 9:1이하), 종교의 부패는 극심하였다.

    호세아서는 호세아의 가정생활을 통하여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지만 고멜은 세 자녀를 낳고 떠나버린다. 그러나 그는 부정한 고멜을 용서하고 다시 그녀를 맞아들인다. 호세아의 불행한 결혼생활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상징하는 "예언자의 상징적 행동"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은 결혼한 여인이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따라간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고멜을 다시 맞아들이듯이 하나님께서도 부정한 이스라엘을 용서하고 다시 맞아주신다는 것이다. 호세아에게 있어서 종교란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복종하는 일이었다. 죄란 이 진실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는 불신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배은망덕한 죄에 대한 심판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고멜이 용서받듯이 심판은 죄의 처벌의 차원을 넘어서서 구원을 위한 출발이며, 진통이다. 그러므로 호세아에게 있어서 심판은 단지 파괴와 멸망이 아니라 구원과 속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3. 이사야

    이사야서는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1-39장 : 이사야

    40-55장 : 제 2이사야

    56-66장 : 제3이사야

    이사야서를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위와 같은 3부분이 시대적인 배경이나 중심사상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구분을 놓고 학자들간에 오랜 세월 동안 논란이 되었다.

    이사야서의 구조(1-39장).

    1)1-12장 :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

    2)13-23장 : 이방인과 이방국에 대한 예언

    3)24-27장 : 이사야의 묵시

    4)28-35장 :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뜻

    5)36-39장 : 역사적 배경(왕하18:13~20:19)

    이사야의 활동.

    이사야는 아모스의 아들(예언자 아모스와는 다른)이며, 주전 8세기 중엽, 남유다에서 활동하였다(742-700). 그는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등 세 왕에 걸쳐 40여년간 활동한 예언자이다. 그는 유다 왕국의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예언자로 소명을 받았고, 요담 왕과 아하스를 걸쳐, 히스기야 왕때 앗수르 제국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할 때까지 계속 활동하였다.

    메시지

    초기 활동(742-734)(3 : 이 기간은 주로 요담의 치세 기간으로 비교적 안정되고 풍요로운 시대였다. 따라서 아모스와 호세아 처럼 유다의 교만, 탐심등 죄악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야훼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이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1:4). 이사야는 유다의 병패가 권력을 가진 자들의 횡포였다고 보았다. 이들은 부를 축적하기에 급급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등한이 하고 마술사와 점쟁이들의 유혹에 걸려 들었고 관리들도 과부와 고아의 신원을 보호하는 대신 뇌물에 눈이 어두웠다(1:23). 이사야는 시리아 - 에브라임 전쟁 때 아하스가 앗수르에 원군을 요청한 것을 비판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강조하였다(임마누엘 예언신탁, 7:10-17).(4

    두 번째 시기, 잠정적 은둔 기간(734-715년) :

    아하스가 이사야의 말을 듣지 않자 그의 활동을 중단하고 은둔에 들어간다(8:16-17). 이 시기에 그는 제자에게 글을 남기게 된다.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이라"(8:16).

    세 번째 시기(715-705) : 중기 활동으로, 아하스가 죽고 히스기야가 즉위하자 그는 다시 공적인 활동을 한다. 이 시기에 북쪽의 사마리아와 다메섹 도시는 앗수르에게 패배하였고, 711년에는 앗수르에 반기를 든 이집트-팔레스틴의 동맹국들이 패배를 해 블레셋의 아스돗이 파멸 당했다. 이 때 이사야는 벌거벗은 몸으로 거리를 다니는 상징적 행위를 통하여 예루살렘의 당국자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무력을 의지하여 반란을 계속한다면 포로로 끌려가는 불행을 겪게 될 것을 경고하였다.(5

    네 번째 시기, 후기 활동(705-701) : 히스기야가 앗수르에게 반기를 들어 다른 나라들과 반앗수르 동맹에 가담하였다. 이사야는 바벨론이나 이집트도 믿을 것이 못되며 이들과의 동맹은 '죽음의 계약'(28:15)이라고 불렀다. 그보다는 오히려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라"(30:15)고 선포하였다.

    이사야의 예언의 특색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세계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은 유다에 국한된 것이 아닌 전체적인 세계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세계의 완성을 바랐던 것이다. 이사야는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만국 평화의 웅장한 시를 썼다(2:1-4). 2)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체득하고 증거하는 것이다. 아모스가 의의 하나님을 증거하고, 호세아가 사랑의 하나님을 증거한 것처럼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증거하였다. 그가 증거한 하나님은 이상적인 윤리적 실재로 유일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그는 죄에 대하여 국민과 함께 공동 책임을 느꼈던 것이다. 이사야에 있어 거룩하신 하나님은 한층 더 윤리화되어 체득되었다는 데 그 특색이 있다. 3)남은자'와 메시아 사상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국민에게 전할 사명을 받은 이사야는 조국의 참담한 죄상과 장차 올 심판을 생각할 때 그의 마음은 어두웠지만 소수(少數)의 '남은 자'가 있어 하나님께 돌아와 믿음으로 새출발 하리라 믿었으며(10:20-22), 이러한 희망은 메시아가 나타나 유다뿐 아니라 온 세계, 그리고 자연계에 영원한 평화를 가져오실 것이라는 것이다(9:1-7, 11:1-9).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의 예언자로 일컬어지며, 구약의 최대 예언자로 평가된다.

    4. 미가

    구조.

    미가서는 준엄한 심판의 말씀과 희망의 말씀이 교차되는 구조를 보여준다.

    1)1~3장 : 심판의 말씀

    2)4~5장 : 희망의 말씀

    3)6~7장 7절 : 심판의 말씀

    4)7장 8절~20절 : 희망의 말씀

    활동 연대.

    미가는 이사야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였다(722-701). 이사야가 예루살렘에 살았으며 왕가(王家)와 가까이 지낸 것과 달리 미가는 유다 지방의 작은 마을인 모라셋(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40킬로 정도 떨어진 마을) 출신이었다.

    메시지.

    미가는 독립심이 강한 농촌 사람으로서 부패한 도시문명을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이사야는 시온(예루살렘)이 망하지 않으리라고 믿었지만 미가는 하나님의 심판이 예루살렘은 물론 성전까지도 포함된다고 하였다. "시온은 밭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3:12). 이 예언은 한 세기 후대 사람인 예레미야에 의해 다시 인용되었다(26:18). 미가의 예언은 정의, 사랑, 겸손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함이 아니냐"(6:8). 미가는 당시 경제의 어려움이 공의를 행하지 않는 두령과 치리자, 그리고 채권자들, 권력자들의 부정 부패로 인한 것이며 정의의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선포하였다(2:2, 3:1~3, 7:3~4). 미가는 메시아 예언에서 이사야 처럼 왕의 후손으로 올 것을 말하지 않고 평민 가운데서 미천한 몸으로 날 것을 말하였다(5:2~5).

    C. 주전 7세기 예언자

    1. 스바냐

    구조.

    스바냐서의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1장 : 여호와의 날의 선언

    2)2장 : 여호와의 날에 대한 경고

    3)3장 1~7절 : 여호와의 날의 심판

    4)3장 8절~20절 : 여호와의 날의 축복

    이처럼 스바냐의 예언의 주제는 여호와의 날이다.

    활동 연대.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후손(유다왕 히스기야일 가능성이 많다)이었으며 유다의 요시야 왕때 활동하였다. 그가 종교의 부패를 크게 공격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요시야의 종교개혁(주전 621) 이전에 활동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주전 628~622).

    메시지.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직전에 유다왕국은 종교적으로 매우 혼탁하였으며 혼합종교로 전락해 있던 상황에서 스바냐는 "야훼의 날"을 선포하였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무서운 날이다. 유다에서 전쟁의 소리가 들릴 것이며(1:7, 12, 14~16), 다른 민족들도 그들의 사악한 길들로 인하여 징벌을 받을 것이다(2:5, 9, 12, 3:8). 그리고 유다에는 겸손하고 의로운 백성들이 남을 것이며 하나님의 통치하에 살아갈 것이다(2:7, 3:12~13).

    2. 나훔

    구조. 두 부분으로 나뉜다.

    1)1장 1절~2장 2절 : 하나님의 정의의 선언, 니느웨의 멸망.

    2)2장 3절~3장 19절 : 하나님의 정의의 실증, 니느웨 함락의 실상

    활동 연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함락되기 직전(주전 621)에 활동하였다.

    메시지

    나훔은 엘고스 사람이다. 그러나 현대의 지명은 정확하게 어디인지 모르며 예루살렘과 가사 중간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책의 두 부분은 모두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심판하시는 것을 말하고 있다.

    3. 하박국

    구조

    1)1장 1절~2장 5절 : 하박국의 항의와 하나님의 응답

    2)2장 6~20절 : 하나님의 심판

    3)3장 : 하박국의 기도

    활동 연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세계의 통치자로 등장하던 때 하박국은 활동하였다(605).

    메시지

    하박국의 메시지의 배경은 예루살렘이 멸망되기 직전인 주전 605년 경으로 종교개혁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그들의 나쁜 습관에 빠져들고 있었다. 특히 하박국은 백성들이 보상과 형벌이라는 신명기적 원리를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에 당황하였다. 하나님의 보상과 심판이 의로운 행동과 악한 행동에 의해서 정확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박국은 하나님께 질문한다. 질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오! 여호와여 유다에서 큰 악행들이 형벌을 받지 않고 그대로 지나가나이까?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1:1-4, 1:13).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그 심판의 도구로 바벨론을 일으켜 유다를 칠 것이며 정한 때에 바벨론 사람을 심판 할 것이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1:5-11, 2:1-4)라고 하셨다. 하박국은 모든 악을 행하는 자들은 징벌을 받을 것이며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하박국의 마지막 장인 3장에는 구약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사의 시로서 끝을 맺고 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는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즉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3:17-19).

    4. 예레미야

    예레미야서의 구조

    1)1~25장 : 유다의 죄에 대한 책망과 심판의 말씀

    2)26~29장 : 예레미야에 관한 전기적 기록

    3)30~35장 : 희망의 말씀(31:31~34, 새계약)

    4)36~45장 : 예레미야의 수난 기록

    5)46~51장 : 이방 외국에 대한 심판의 말씀

    6)52장 : 유다 왕국 멸망에 관한 역사적 기록

    예레미야서는 후대에 여러 차례 복잡하게 편집된 문서로 알려지고 있다.6 그러나 대부분이 그 자신이 기록한 예언의 부분과 제자 바룩이 쓴 예레미야의 전기가 압도적이다. 그의 예언은 그 후 제2이사야에게 영향을 미친것으로 알려진다.7

    예레미야 활동 연대(627~587)

    기원전 650년경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약 3마일 정도 떨어진 것에 위치한 아나돗에서 출생했다(렘1:1). 이때는 므낫세왕의 통치 말기에 해당되며 요시야 왕 제13년(B.C. 627(6)년경)에 20세의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아비아달(8의 후손인 힐기야 제사장의 아들이었다. 예레미야의 예언사역은 약 40년간(627-587) 지속되었으며 587(6)년 예루살렘 함락과 더불어 붙잡혔다가 친바벨론 인물이라고 석방되었고 그 후 바룩과 더불어 이집트로 도피했다. 그는 이집트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였으며 그의 소식은 여기에서 끝이 나는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의 비극은 한 개인으로서 겪게되는 개인적 성격의 것이 아닌 민족적인 슬픔을 경험하고 그 슬픔을 남겨 놓았다.(9 그의 생애 중 커다란 2대 사건은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과 예루살렘의 함락이다. 그는 이사야와 더불어 구약의 최대 예언자로 불린다

    시대적 배경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하였고, 앗수르는 612년 신흥 바벨론에게 패망하였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605-562 B.C.)은 근동의 여러 나라를 수하에 넣은 뒤 그 동안 힘이 미치지 못한 남쪽지역인 애굽 지역마저 손에 넣으려 했다. 이때 애굽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고자 하여 605년 유다의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부왕의 위급한 소식을 듣고 그의 군사들과 함께 철수하였다. 그러나 20년 후 또다시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이때가 유다왕 시드기야 9년인 587년 10월이었다. 이 전쟁은 육개월이라는 기간동안 치러졌으며 결국 바벨론에게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만다. 이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예루살렘과 성전은 온통 정복자들에게 약탈의 장소를 제공하였다.

    메시지

    에레미야는 유다의 부패와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심판이 다가옴을 말했다. 불의를 자행하고, 계약을 깨뜨렸고, 회개하기를 거부함으로 북쪽의 세력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그의 예언 활동은 크게 다음의 두가지에서 이야기 할 수 있다.

    1)남은 자 : 무화과 두 광주리에 대한 환상(24:1-10)에서 자기 백성들 가운데 존재하는 두 가지 남은 자들을 보았다. 하나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향에 남아 있었거나 애굽으로 달아났던 사람들이다. 특히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간 포로들에게 희망을 선포했다. 남은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이며, 고향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31:17).

    2)새 언약 : 예레미야의 예언 가운데 가장 독특한 부분은 새 언약에 대한 부분이다. 지금까지의 계약은 돌판이나, 글로 써서 기록했지만 이제는 마음에 기록하시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파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불어 새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보라 새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31:31~34)

    예레미야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개인의식이 뚜렷하여 하나님 대(對) 자기(自己)라는 개념이 명백하다는 것이다(20:7~9절 참고).

    D. 포로기 예언자

    1. 에스겔

    구조

    1)1~24장 : 심판의 말씀

    2)25~32장 : 이방 외국에 대한 말씀

    3)33~48장 : 희망의 말씀

    활동연대

    에스겔서는 그의 활동과 관련하여 13회의 연대가 기록되어 있다. 그가 예언자로 소명을 받은 것은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잡혀 바벨론으로 온 지 5년째 되던 해 4월 5일이었다(1:1~3). 이 때는 주전 593년이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활동은 "제 27년 1월 1일"(29:17)로 기록되어 있다. 주전 571년의 일이다. 따라서 그의 활동 연대는 주전 593~571년이다. 에스겔은 포로지인 그발 강변에서 22년 동안 활동하였다.

    메시지

    유다왕국이 멸망하기 직전인 593년에서 587년 사이에 선포된 예언은(1장에서 24장까지) 유다백성의 죄에 대한 책망과 임박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그리고 에스겔은 백성들이 회개하여 죄의 길에서 돌아선다면 하나님께서 예정된 징벌을 취소하신다는 것이다(18:30-32). 그러나 백성들의 회개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유다 왕국은 멸망한다.

    주전 587년 유다의 멸망은 예언의 방향을 바뀌게 한다. 죄에 대한 심판과 책망에서, 이제는 희망을 말한다. 심판 후에 일루어질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희망을 말한다(33장부터). 에스겔은 다시 재건 될 새성전, 새 예루살렘, 그리고 새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보여주었다(40장-48장). 그리고 "마른뼈 골짜기의 환상"(vision of the valley of dry bones)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포로지에서 마른 뼈와 같은 처지가 되었지만은, 하나님께서 다시 "부활"(이스라엘의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37장).

    2. 제2이사야

    구조

    1)40장 1절~11절 : 아훼의 오심(서론)

    2)40장 12절~44장 23절 : 제2이사야의 구두 신탁

    3)44장 24절~45장 13절 : 고레스에 관한 신탁

    4)45장 14절 ~55장 15절 : 제2이사야의 문서화된 시

    5)55장 6절~13절 : 야훼의 은총(후기)

    활동 연대

    제2이사야에 해당하는 40장~55장은 그 내용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있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와 희망의 글이다. 따라서 그가 활동한 시기는 포로기간으로 보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또한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인지도 알 수 없다.

    메시지

    제2이사야의 핵심 메시지는 "새출애굽"의 꿈이었다. 새출애굽이란 바벨론포로 생활에서 고국으로 귀향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메시지는 고난의 종의 노래이다. 그 귀절은 다음과 같다.

    1)42:1~4

    2)49:1~6

    3)50:4~9

    4)52:13~53:12

    위의 시 중 마지막 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묘사하는 것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잘 알려진 내용이다. 학자들의 논제는 이 고난의 종이 정확하게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에 집중되어 왔으나 아직까지도 의견을 통일하지 못하고 있다.(10

    3. 오바댜

    구조

    구약 예언서 중 가장 짧은 1장의 책이다.

    1)1절~16절 : 에돔에 대한 심판의 말씀

    2)17절~21절 :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희망의 말씀

    활동 연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며 포로기 기간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것 같다.

    메시지

    에돔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예들인 것으로 전해지는 데, 아우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구약의 곳곳에서는 그 기록이 남아있다(시137:7, 신23:7-8). 에돔이 이스라엘로 부터 독립한 것은 주전 743년의 일이다. 그리고 에돔은 이스라엘의 가시같은 존재가 되어왔던 것이다. 이러한 에돔을 향하여 오바댜는 하나님의 저주를 선포한다.

    E. 포로기 이후 예언자

    1. 포로기 이후 역사적 배경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은 뚜렷한 주권을 갖은 국가형태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팔레스틴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정치적 변화에 큰 힘을 입은 것이었다. 즉 바벨론이 고레스에 의해 평정되고, 고레스의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정책이 칙령을 통해 발표되자 팔레스틴에도 획기적인 변화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전의 국가들에 의해 포로로 끌려왔던 사람들에게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길이 열린 것이다. 따라서 팔레스틴 내부에서도 유배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남아있던 사람들과 더불어 그들의 공동체를 갖출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노력은 포로민의 귀환과 성전재건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공동체의 재건은 주로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남아 있다가 팔레스틴내에서 기득권을 잡은 사람들과 갈등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이 갈등의 모습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관계에서 나타나는데 지금까지 유다지방을 자신들의 영토로 생각해왔다가 옛 주인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를 반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귀환민들이 대페르시아 제국, 황제의 칙령을 토대로 작업에 나섰으므로 반대자들은 이를 제지하지 못하고 새롭게 펼쳐지는 그 과정에 자신들도 개입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제안은 거절당하고 만다. 이외에 또 하나의 문제는 성전재건에 필요한 재원 문제였다. 고레스의 약속에 의해 원조 받았던 재원은 팔레스틴이라는 약소민족의 성전재건에 대한 것이므로 곧 그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원조가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522년 다리우스의 등극으로 인한 혼란에서 오는 정치적 기회와 예언자 학개 등의 독려로 인하여 성전재건 작업이 착수된다.

    귀환 당시의 예루살렘 상태는 다음과 같다. 주전 587년에 반란으로 인해 유다 땅은 황폐해졌다(렘 30:18, 32:43). 예루살렘이 점령되었을 때, 방어선이 무너지고(왕하 25:10), 성전과 왕궁 및 부유층의 저택은 불 타 버렸다(왕하 25:9). 성전의 놋쇠 집기들은 파손되었고, 값나가는 그릇들은 가져가 버렸다(왕하 25:13-17). 제사장들도 살해된 지도자 중에 포함되어 있었으며(왕하 25:18-21), 다른 사람들은 포로가 되었다(렘 39:9, 비교. 스 2장, 느 7,8장).(1 이런 상태의 예루살렘 상황에서 제의가 이루어지기는 힘든 상태였으며, 제의가 이루어졌다 해도 온전한 모습은 아니었다.

    학개가 활동하던 역사적 시기는 포로기 이후로 페르시아 고레스왕이 칙령을 통하여 포로로 잡혀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국으로 귀환을 허용했던 때이다. 더욱이 예루살렘 성전재건을 허락 받았으며 성전 재건에 필요한 기물도 가지고 가도록 허락했다.

    귀환자들은 세스바살의 지도하에 복귀하였다(에스 1:11). 귀환자들 중에는 후임 유다 총독인 스룹바벨과 대사제로 임명받은 사독가문 출신 여호수아가 있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성전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성전재건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어려가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중 첫 번째 어려움은 사마리아와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사마리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성전재건이 자신들의 기득권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성전재건을 반대하였다. 두 번째 어려움은 성전재건에 필요한 재원 문제이다. 페르시아 왕실이 약속한 원조가 제 때에 제공되지 않았거나 아예 이루어지지 않아 성전 건축에 많은 어려움이 초래되었다. 이에 따라 성전은 기초공사 이상 더 진척되지 않았으며 건축이 중단된 상태였다. 세 번째 어려움은 유다인들 스스로가 성전건축 규모 등에서 실망한 것에서 나타난다. 귀환 당시 가졌던 의욕이나 희망을 잃어버리고 성전건축을 포기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시대에 포로기 이후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2는 성전과 밀접한 예언을 하면서 등장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학개 스가랴의 메시지가 성전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이다.

    2. 학개

    학개의 연대는 1장 1절에 다리오왕 2년 6월로 되어 있다. 마지막 신탁은 2장 20절에 '그달 14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학개의 활동은 4개월의 짧은 기간에 국한된 것이다. 그의 개인적 신상에 대해서는 잘 나타나 있지 않다. 학자들은 그가 그의 이름이 축제와 관계 있기에 제의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찾고 있다. 그리고 예루살렘 공동체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 성전재건파의 일원으로 보기도 한다.(3

    학개서 구조

    1)1장 1-15절 : 성전재건 촉구

    2)2장 1-9절 : 새로운 성전에 대한 강조

    3)2장 10-14절 : 이방 사마리아에 대한 거부반응

    4)2장 15-19절 : 성전건축에 따른 결과(축복)

    5)2장 20-23절 : 이스라엘 앞날에 대한 예고

    학개서는 성전재건을 재 촉구하는 예언자의 신탁(1:2-11)과 그 사업의 지속적 추진을 촉구하는 예언자의 신탁(2:2-9; 11-19)로 나뉘어져 있다.

    학개에 대한 보도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의 활동시기는 1장 1절의 '다리오왕 2년 6월'이라는 보도를 통해 그가 주전 520년, 즉 포로귀환 후 예루살렘에서 예언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학개의 신분에 대해서는, 그가 성전재건에 대한 지속한 관심,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해 질문한 것 등의 표현을 통해 그가 성소와 관련된 제의 예언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학개의 신분에 대한 것 중 논란이 되는 것은 학개가 포로지에서 돌아온 사람인가, 아니면 포로귀향민이 아닌 거류민인가 하는 문제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학개가 포로지에서 돌아온 자일 가능성이 많다고 보고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지에서 해방과 함께 야훼의 영광이 다시 그들에게 임하고, 유다 공동체가 화려하게 복귀되리라는 꿈을 안고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포로지에서의 예언대로 현실은 맞아떨어지지를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개는 성전재건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유다 공동체 재건의 구상을 펼치고 있다.

    학개의 메시지

    1)성전재건의 필요성

    학개서 전체를 통해 볼때 학개의 메시지는 성전재건으로 점철되어 있다. 성전이 재건되지 않았기에 이스라엘은 고난을 당하고 있으며, 성전이 재건되면 모든 부귀 영화가 곧 도래할 것을 예언하므로 학개가 얼마나 성전 중심체제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2)스룹바벨에 대한 메시아 기대

    학개의 마지막 신탁(2:20-23)은 유대 총독 스룹바벨에 대한 것이다. 학개는 스룹바벨이 야훼의 택함을 받은 인(印)이라고 말한다(2:23).4

    실제로 스룹바벨은 페르시아 당국이 임명한 유대 총독이었다. 박경철은 학개가 이상으로 한 포로기 이후의 사회상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학개가 스룹바벨을 통해 실질적인 유대의 국권을 회복하려는 계기로 삼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학개는 오히려 성전이 재건되면 야훼의 영광이 그 위에 있고 다윗을 야훼의 종으로 삼으신다는 에스겔의 신학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학개는 유대공동체의 재건을 포로기 에스겔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신정체제를 이어나가려 했다고 볼 수 있다.5

    3)사마리아와의 분리주의

    학개 2장 10절에서 14절은 부정한 성물과 부정한 자들에 대한 내용이다. 12절에서는 거룩한 것이 부정한 것에 닿았다고 해서 그 부정한 것이 거룩하게 되지 못하며, 13절에서는 부정하여진 것은 다른 것이 닿으면 부정하게 된다는 부정의 전염성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부정한 것은 곧 사마리아인들을 가리키고 있다.6

    이와 같이 포로기 이후 유대 공동체 재건 구상에 대한 학개의 입장은 성전 중심의 신정체제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학개의 구상은 그의 예언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 더욱이 메시아로 기대되었던 스룹바벨은 얼마 못 가 페르시아 정권에 의해 숙청되고 만다.(7

    예언의 중심사상.

    예언자 학개는 성전을 폐허로 방치한 체 자신들의 집에만 안주해 있는 사람들의 태도를 힐책 한다(1:4). 그리고 백성들을 격려하면서 성전재건 공사를 시작하도록 촉구한다. 더 나아가 야훼가 시온을 자기 통치 중심지로 삼았으며, 이방 민족들을 몰락시켜 그들의 보화로 성전을 가득 채워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화려하게 꾸밀 것이라고 하였다(2:1-9). 그리고 유다 총독 스룹바벨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새로운 이스라엘과 뭇민족을 다스리는 주권자라는 것을 선포하였다(2:20-23).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을 비롯한 본토에 남아있는 자들을 부정한 자들이라 하여 철저히 배제할 것을 주장하는 분리주의자적 입장을 취했다(2:10-14).1

    결론: 사회상을 반영하는 구절들

    1장 2절. 4절에 나오는 사람들은(소수 부유층) 아직 성전을 지을 때가 아니다고 말함으로서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기존 체제(성전이 없는 상태)를 고수하려고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1장 4절. 성전이 무너졌지만 소수 부유층은 나무로 지은 좋은 집에 살면서도 성전을 건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개는 이를 지적하였다.

    1장 6절. "씨를 많이 뿌렸어도 수학은 적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취하지 않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고, 품꾼은 그 삯을 받아도 구멍난 전대에 넣을 뿐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당시 가난한자들의 현실을 잘 알 수 있다. 씨를 많이 뿌렸지만 씨를 뿌린 자에게 돌아갈 몫이 적으며, 먹어도, 마셔도, 입어도, 항상 부족함을 느껴야만 되는 상황이다. 더구나 품꾼의 위치는 더욱 비참하다. 그들은 품삯으로는 삶을 영유해 가는데 있어 구멍난 전대에 넣은 것처럼 부족할 뿐이다.

    1장 10-11절. 그 당시 있었던 흉년으로 수확이 적었음을 알 수 있다. 학개는 그 원인이 자신의 풍요함만 추구하는 소수 부유층에 있음을 지적한다. 즉 하나님께서 부유한 자들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백성을 외면한체 자신의 풍요만을 추구하는 악을 범하였기에 이스라엘 전체에게 흉년과 기근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2장 10-14절. 이 구절은 학개가 제사장에게 두 가지를 질문을 하는 대목이다. 첫 번째 질문은 제사장이 만일 희생 제사에 드릴 제물로 택한 고기를 들고 가다가 그의 옷자락이 떡이나 포도주나 기름 같은 다른 음식물에 닿으면 그 닿은 음식물은 거룩한 음식과 간접적인 접촉을 했으므로 거룩한 것이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거룩은 문자적인 의에서 전염성을 지닌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다이다. 두 번째 질문은 첫 번째 질문과 유사하나 정반대의 질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시체와 접촉을 했다던가 하는 이유로 인해 제의적으로 부정하게 됐다면, 그리고 그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음식물들을 만졌다면, 그 음식물들이 그러한 접촉에 의해 부정해질 것인가 하는 것이 두 번째 질문이다. 제사장의 대답은 부정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의적인 부정은 전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2

    이 구절의 교훈은 사마리아와의 관계에 대한 구절로 이해되어져 왔다. 즉 부정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건축에 참여하게 될 경우 거룩한 성소를 더럽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3 

    그러나 이구절을 좀더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12절은 학개가 잘못된 대상에 대해 실제적인 지적이다. 거룩한 것은 전염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은 거룩이 전염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절은 두 번째 질문이며, 그 답은 부정한 것이 전염된다는 것이다. 이 질문은 첫 번째 질문의 답을 유도하기 위한 누구나 아는 사실을 질문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결과로 그 시대가 불의가 만연한 사회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제의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불의이다. 14절에는 이러한 불의가 "이 백성" "이 나라" "모든 일"에 있어 만연되었음을 지적한다. 불의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불의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빙자하여 특히 1:6절처럼 백성들을 착취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지금까지 학개서에 나타난 사회상을 개괄하였다. 학개가 예언하던 시대는 백성들이 시대적인 어려움에 편승하여 그 어려움이 더욱 고조되었으며, 예언자 학개는 이들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겪어야만 했던 민족적인 어려움은 백성들을 돌아보지 않는 악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악에서 돌이킬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학개는 예언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예언자 학개는 포로기 이전 예언자들과 같은 맥락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그가 백성의 편에 서서 예언을 하였기 때문이다.

    3. 스가랴

    스가랴서는 묵시문학적 성격의 책이기 때문에 본서에서는 묵시 문학적 시각에서 스가랴서를 설명하고자 한다.

    스가랴 1장1절에 스가랴는 잇도의 손자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느헤미야 12장 4절에는 주전 520년 스룹바벨과 함께 예루살렘에 돌아온 제사장 명단에 잇도라는 이름이 수록되어 있으며, 느헤미야 12장 16절에는 스가랴가 잇도 제사장 가문의 수반으로 기록되어 있다.(4

    1)제1스가랴: 1장-8장

    구조

    1:1-6 서론

    1:7-6:8 8개의 밤 환상

        1:7-15 첫째 밤 환상-붉은 말을 탄 기사

        2:1-4 둘째 밤 환상-뿔과 대장장이

        2:5-9 셋째 밤 현상-예루살렘 측량

        3:1-7 네째 밤 환상-하늘 법정

        4:1-6(4:10-14)

             다섯째 밤 환상-등불과 올리브 나무

        5:1-4  여섯째 밤 환상-저주의 두루마리

        5:5-11 일곱째 밤 환상-말 속의 악

        6:1-8  여덟째 밤 환상-병거와 말

    7:1-8:19 금식에 관한 질문을 중심으로 하는 예언의 말

    스가랴서 1-8장은 묵시적 단편으로서 묵시적인 여덟 개의 밤 환상과 예언적 말들, 그리고 예언자적 역사해석이 전제된 권고인 서론으로 되어 있다.(5

    스가랴의 예언활동은 최소한 주전 520년 여덟째 달부터 주전 518년 아홉째 달까지를 포함한다(1:1, 7:1). 이 시기는 페르시아 식민지 시대로서 다리우스 1세가 제국의 왕권을 차지한 초기 시대였다. 스가랴의 예언은 학개와 마찬가지로 성전 재건에 대해 강조하는데, 성전재건의 이유를 이상적 왕국 유다의 재건과 관련시킨다(슥 8:12, 20-23). 스가랴는 기존사회의 재편을 전재하면서 성전재건을 강조하는 것이다. 당시 유다 지역은 사마리아 지역의 지배층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의 부유층으로 권력을 가진 자들은 사마리아와 긴밀히 연결되는 것이 필요했다. 요컨대 유다지역의 기존 권력집단은 사마리아 지배층과 동일시 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백성을 속이고 공정치 않은 재판을 행하였다(슥 8:17). 이것은 아마도 농민의 토지를 빼앗아 자기 소유로 만드는 행위를 수반하고 있는 말인 것 같다.(6  왜냐하면 구약성서에서 부정한 재판은 곧잘 권력자들의 이러한 토지 착취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7 유다지역에서 성전재건이 의미하는 바는 사마리아 지배층의 세력을 배제하는 일 뿐 아니라 유다지역에서 기존의 권력층을 배제하는 일을 의미하는 사회적 재편이었던 것이다.

    스가랴는 묵시적 언어를 사용하여 예언활동을 하였으며 이런 표현 방식은 민중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제2스가랴: 9-11장

    이 부분은 제2스가랴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이 시기는 마케도니아에 의한 페르시아 멸망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뚜렷하게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하드락,` 다마스커스, 하맛, 띠로, 시돈, 불레셋 등이 정복되었고(9:1-8), 그 정복자가 그리스임이 암시되어 있다(9:13). 다시 말해서 마케도니아가 시리아-팔레스틴 지역을 정복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이 책이 쓰여졌음을 암시한다.(8 특히 주전 331년에 있었던 사마리아 민중봉기가 구체적 배경이다. 제2스가랴는 그 당시 다시 일기 시작한 민중의 메시아 기대를 한껏 확산시키려 한다.(9 알렉산더의 전쟁은 하나님의 변혁행위의 서곡이었다. 이제 하나님은 인간을 무기로 삼아 불의한 역사를 극복하는 일을 벌이실 것이다. 이 불의한 일을 집행할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유다와 이스라엘의 백성들이다(9:13이하). 하지만 이들 중에는 기존 사회의 지배자들이 포함되지 않는다(10:3). 그들은 백성을 착취하고 노예로 팔아버리는 일을 일삼았던 자들이다(11:4-5). 그들은 야훼를 들먹이며 이 일을 행했지만 도리어 야훼께서는 그들을 벌하시고 말 것이다(11:7).

    이런 불의한 상황에서 예언자는 외친다. 야훼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실 메시아는 권력자가 아니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나귀를 타고" 오실 것이다(9:9) 그 분은 왕족 출신도 아니고 사제귀족 출신도 아니다. 그는 바로 민중적인 존재였고, 민중적인 실천을 벌이실 존재이다. 그는 무기들을 없애고 평화를 가져올 존재이다(9:10). 이러한 평화사상은 민중이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사상이었다. 왜냐하면 권력자들은 민중을 마구 전쟁터로 몰아갔고, 정복자들이 지나가는 마을마다 남자들은 죽거나 노예로 끌려갔으며 여자들은 겁탈 당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생계수단인 농경지는 황폐해졌기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제2스가랴는 정복자적인 메시아와는 상반되는 평화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단 이 평화는 현존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어떤 권력자도, 마케도니아의 군주도, 유다와 에브라임의 지도자들도 모두 심판의 대상에서 배제되지 않기 때문이다(9:13, 10:11,17).(10

    3)제3스가랴서: 12-14장

    이 책의 내용도 제2스가랴서와 마찬가지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제2스가랴서보다는후대의 것으로 본다. 제3스가랴서의 배경은 주전4세기이후이며, 그리고 아마도 다니엘서의 형성시기보다 늦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에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와 시리아의 셀류커스 왕조의 통치시기로 볼 수 있다. 구체적 시기를 규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12장 10절이하를 토대로 볼 때 이 상황은 '순교의 현실'임을 알 수 있다. 즉 어떤 투쟁과 장렬한 투쟁이후 장례식이 암시되어 있다.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약탈당하고, 여자들이 겁탈 당하며, 주민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상황이다(14:1-2). 제3스가랴서의 배후에는 순교의 상황,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투쟁의 상황으로 짐작된다.

    제3스가랴의 메시지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 순간을 극복하는 데 메시아의 개입을 선포한다(13:8-9). 즉 하나님은 올리브 산에 거점을 정하고 나타나 온 세상을 둘로 갈라 놓고 말 것이다(14:4). 그리하면 추위가 극복되고 밤이 극복되고, 메마른 땅이 극복되어 기름진 땅이 될 것이다(14:6-8). 이러한 유토피아 상에는 처절하게 착취당하는 농민의 염원이 소박하게 담겨 있다. 결국 구원은 민중을 착취하는 전제적 왕권이 재현되는 의미에서의 구원이 아닌 민중의 열망이 현실화되는 의미에서 구원이다.(11

    제3스가랴는 현실의 고통스런, 암울한 투쟁 속에서 민중으로 하여금 '예정된' 승리를 향해 불굴의 의지로 싸울 것을 독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3스가랴가 펼치고자 했던 묵시운동의 내용이었던 것이다.(12

    4)결론: 사회상을 반영하는 구절들

    스가랴서는 묵시서로서의 위치 때문에 백성들의 현실을 토대로 쓰여졌음을 알 수 있었다. 스가랴는 당시의 어려운 현실에서 고난 당하는 백성들에게 야훼의 임박한 개입을 알리고 있다.

    7:9-12절(8:15-17). 이 절에서 스가랴는 불의한 재판과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한 사실과 남을 해치려는 생각을 지적하고 있다. 이 같은 무리한 악을 행하는 자들은 그 마음이 금강석같이 단단하여 율법과 예언자의 말을 듣지도 않으려고 귀를 막았다. 스가랴의 8개의 환상은 위와 같이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지적과 심판에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다. 이 같은 메시지는 이스라엘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지만, 좀 더 정확하게는 불의를 행하는 소수 권력층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불의는 소수의 권력층에서 비롯되어 이제는 이스라엘의 모든 사회가 거짓 맹세와 해함을 도모함과 진실을 외면하기에 이른 것이다(8:15-17).

    9:9-17. 나귀 새끼를 타고 등장하는 평화의 왕에 대한 묘사이다. 이 모습은 모든 백성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왕이며, 그 왕이 다스리는 이상적인 사회이다. 이 평화의 날에는 이전의 압제하는 모든 세력을 꺽고(9:10), 갇혔던 자들을 놓아주며(9:11), 이전에 당한 불이익에 대한 보상이 있으며(9:12), 그리고 민족적 입장에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그 어떤 무리들도 제거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한다(9:13-15).

    10:2절. "대저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치 않 는 것을 보고 거짓꿈을 말한즉 그 위로함이 헛되므로 백성이 양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여기에서 포로기 이후 사회에 거짓예언이 행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거짓예언은 백성들을 압제하는 데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그 같은 체제를 공공연하게 인정하도록 하였다.

    스가랴는 학개와 마찬가지로 포로기 이후 예언자의 특징인 제의에 대한 관심이 많았으며, 백성들의 편에 서서 예언을 하였다.

    포로기 이후 예언자들이 희망한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

    학개와 스가랴는 포로기 이후의 이상적인 사회상을, 지금껏 압제 당했던 백성들이 회복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학개는 스룹바벨에게, 스가랴는 여호수아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들을 통한 하나님의 신정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 이후 시대에 나타난 모습은 예언자들이 바라던 이상적인 사회가 아니었다.

    역대기사가가 그리는 포로기 이후의 이상적인 사회상은 신정적 공동체이다. 공동체의 중요한 두개의 기둥은 예루살렘 야훼 제의와 다윗왕국이 이다.(13 그러나 포로기 이후의 모습을 볼 때 제의적 공동체의 모습은 이루어졌으나, 다윗계통의 한 왕에 의해 왕국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역대기사가가 바라는 신정적 메시아 상은 종말론적 희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역대기 사가는 초월적이 아닌 다윗 왕국이 다윗 시대처럼 재건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14  이러한 역대기사가의 사상은 포로기이후 학개, 스가랴에게로 전달되고 있다. 그들의 메시지에서 다윗왕조의 재건에 대한 부분은 빈약하였지만 신정적 유대 공동체를 희망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4. 제3이사야

    구조

    1)56장~59장 : 하나님의 훈계

    2)60장~66장 : 하나님의 약속

    활동 및 메시지

    제3이사야는 포로기에 활동하였던 제2이사야의 제자로 추정된다. 그러나 제3이사야는 제2이사야와는 또 다른 역사적 정황에서 활동하였다. 제2이사야는 훗날 이루어질 포로귀환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차 있지만 제3이사야는 기대와 희망이 현실로 이루어져 포로상태로 부터 해방되어 예루살렘에 귀향한 역사적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회복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한 상황을 직면하게 된다. 경제적 빈곤과 성전을 둘러싸고 일어난 주도권 싸움, 그리고 정치적 회복의 불가능이 많은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3이사야는 참된 이스라엘의 회복은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창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선포하였다. "종말론적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

    5. 요엘

    구조

    두 부분으로 나뉜다.

    1)1장~2장 27절 : 야훼의 날 내림(來臨)의 상징으로서 메뚜기 재앙

    2)2장 28절 ~ 3장 21절 : 희망의 메시지(야훼의 날의 축복)

    활동 및 연대

    포로기 이후 페르샤 시대에 활동한 것으로 보이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주전 500~350년, 그 어느 시기에 활동했을 것으로 본다.

    요엘서에는 참혹한 메뚜기의 재앙과 피해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 메뚜기의 재앙은 하나님의 징벌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였다(2:12). 요엘은 "야훼의 날"을 선포하였다. 이날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심판하시며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축복하는 날이다.

    6. 요나

    구조

    1)1장 : 하나님의 부르심과 요나의 도피

    2)2장~3장 : 요나의 감사기도와 니느웨에 대한 예언 선포

    3)4장 : 요나의 노함과 하나님의 교훈

    활동 및 메시지

    요나서의 주제가 이스라엘과 이방민족과의 관련성이며, 에스라-느헤미야의 종교개혁의 배타성과 고립성에 항거하는 반항문학으로 보아 기록연대를 포로기 이후로 잡고 있다.

    요나서의 메시지는 야훼의 사랑이 지상에 있는 모든 민족에게 적용되며 이스라엘은 그 사랑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회개의 중요성이다. 이스라엘의 미움의 대상인 니느웨성 사람들이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징벌을 취소하셨다.

    7. 말라기

    구조

    1)1장 1절~4장 3절 : 6회에 걸친 말라기의 예언

    2)4장 4절~ 6절 : 예언서 전체의 마무리 부분

    활동과 메시지

    말라기가 쓰여진 때를 정확하게 알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포로기 이후 성전과 제사장들의 부패상을 언급한 점으로 보아 적어도 성전 재건 이후라는 것은 알 수 있다. 한가지 주목해볼 수 있는 것은 말라기에 기록된 각종 죄악과 사회의 부패상은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면서 느끼고 한탄해 했던 상황과 거의 비슷하며, 그의 개혁에서도 이런 점들이 언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말라기의 연대를 470년 경으로 본다.(15 말라기가 예언했던 시대는 크세르크세스의 통치시기였던 것 같다. 학개와 스가랴의 영향을 받아서 희망이 고조되었던 시기는 이미 과거가 되었다. 종말론적인 전망도 사라져 버렸다. 선지자는 열정이 식어버린 제사장들이 가진 잘못을 보았다. 사회적 무질서를 질타했으며, 성전에서 부과된 각종 세금이 바쳐지지 않음을 질타했고 아내와 이혼한 남자들, 심지어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아 사는 것을 질타했다. 그는 이런 와중에서 오실 메시아를 예언했다. 그리고 그에 앞서 한 사신을 보낼 것을 언급하고 있다.

    제5장 성문서

    히브리 성서의 세 번째 부분은 '성문서'(聖文書)라고 불린다. 주후 90-100년경 얌니아(Jamnia)에서 바리새인들은 이 부분을 구약의 마지막 정경으로 선별하였다. 이 책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될 수 있다.

    1)시편, 잠언, 욥기

    2)다섯 두루마리 책 - 룻기, 아가, 애가, 에스더, 전도서

    3)다니엘, 역대기, 에스라-느헤미야

    본서에서는 1. 시편, 2. 지혜문학(잠언, 욥기, 전도서), 3. 다섯 두루마리 책, 3. 묵시문학(다니엘)순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A. 시 편

    1. 일반적 고찰

    구약성서 안에는 가장 오래된 시들이 있다. 시는 시편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서에나 예언서에 널려있다. 예언자의 글을 문학적으로 살펴보면 그 대부분이 시형태의 문장이다.

    시편은 기록 된 연대가 다윗 시대인 주전 1,000년부터 주전 200년 사이에 걸친 시 작업으로 이루어졌다(약 800년의 세월). 그리고 이 시편은 제2 성전에서 사용되던 찬송가로 알려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애용하셨다(22:1, 십자가 상에서 -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초대교회에서 찬송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도 찬송가 및 복음송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시편의 제목은 히브리어로 테힐림(Tehillim)이다. 그 뜻은 "찬양"이며, 70인역으로 번역될 때 프살모니(Psalmoi)라고 붙여졌다. Psalmoi는 '줄이 있는 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들'이라는 말이다.

    시편의 책은 원래 두 가지 이름이 있었다. 하나는 테힐림(찬양)이고, 또 다른 하나는 텔필로트(기도)이다. 따라서 시편을 읽는 사람은 찬양하는 법과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시편의 시는 삶으로 고백 된 체험시이다(시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는 문학적인 일에 관심이 없다). 약자인 이스라엘이 강대국을 상대로 고난을 이긴 승리의 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열이 복받쳐 오름으로 생긴 시이다.

    그리고 이런 시들은 예배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시편은 예배시 사용되었다. 따라서 공동체적인 요소가 강했다. 이런 정신으로 인하여 나라가 망해도 예배는 멎지 않았다(시편 137편).

    시편의 전체적인 내용은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노래이며, 다른 하나는 그 하나님을 노래하는 인간 자신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시편에서는 하나님께 신앙을 갖는 것이 가장 큰 보배요, 가장 큰 힘이요, 가장 큰 기쁨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2. 시편의 구조 및 형태

    시편의 구조

    시편은 전체 150편이 5권의 책으로 되어있다.

    제1권 : 1편-42편,

    제2권 : 42편-72편,

    제3권 : 73편-89편,

    제4권 : 90편-106편,

    제5권 : 107편-150편.

    1편은 시편의 서론이며, 150편은 결론이다.

    시편의 형태

    시편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세기 말, H. 궁켈에 의해서이다. 그는 시편을 문학적 양식에 따라 분류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그 문학적 양식이 어떤 상황에서 탄생되었고, 사용되었는가를 추적하는 데 연구를 집중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시편 연구는 오늘날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훌륭한 연구였다. 궁켈의 분류(16 - 1. 찬양시, 2. 탄식시(개인, 단체), 3. 감사시, 4. 제왕시-시온의 시, 야훼 대관식의 시, 5. 지혜시.

    3. 시편의 제목

    34개의 고아시를 제외하고 모두 제목이 있다.

    1)시(57개), 예)다윗의 시 -미즈모(Mizmor)라고 되어 있다-뜯는다의 뜻으로 현악에 맞추어 노래할 시이다.

    2)노래(Song, 30개), 예) 40편

    3)마스길(13개), 예) 시 32:8, 가르쳐 보인다의 뜻, 교훈, 32편, 78편.

    4)믹담(Miktam, 6개), 16,56,57,58,59.60이다. 금과 같이 귀한 것(주옥편) 이라는 뜻이다.

    5)쉬가욘, 그 성질이 열광적인 과격성을 보인다(시편 7편, 하박국 3장)

    6)기도 - 17, 86, 90, 102, 142.

    7)찬송시-145편(1회).

    4. 문학적 접근

    히브리인의 사고 방식은 사변적인 아니고 행동적이다(언어의 특색). 따라서 히브리시도 이런 영향을 받아 상상 속에서 쓰여진 것이 아닌 그들의 행위, 행동 속에서 잉태된 것이다. 히브리시는 다른 나라의 시와 시라는 형태에서 유사성이 있지만 히브리 시만의 독특성이 있다.

    히브리시의 대표적인 특징은 평행법이다. 같은 사상을 다른 말로써 중복적으로 표시하여 강조하는 방법이다. 평행법에는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다.

    동의적 평행법 : 시51편 1절에, 유할 자와 거할 자가 동의어로 반복.

    반의적 평행법 : 시23편 4절. 위험 / 안위(평안)가 반대어로 반복.

    종합적 평행법 : 시2편 6절. 내가 나의 왕을 시온 위에/ 거룩한 산 위에 세우리라. 시온산을 거룩한 산으로 보충하여 반복.

    상징적 평행법 : 시103편 11절-13절. 하나님의 자비(인자)가, 하늘과 땅, 동과 서, 아비와 자식이라고 구체적 상황으로 상징되어 표현됨.

    계단적 평행법 : 점층적으로 첫시행 표현이 종결되지 않고 다음 행으로 발전되어 가는 평행법이다(29:1-2, 3:2-3).

    내성적 평행법 : 시6편 8절-10절. 나를, 내 곡성, 내 간구, 내 기도 등으로 더 발전되어 표현되고 있다.

    B. 지혜 문학 연구

    1. 서론

    구약의 지혜문학은 잠언, 욥기, 전도서 3권의 책이 직접적으로 해당된다. 그러나 지혜문학적인 요소는 오경과 예언서, 시편(37, 49, 112, 133편) 등 구약 전체에서 발견된다.

    구약성서에서 지혜란 "호크마," "하캄"이란 단어로 나타난다. 이들의 뜻은 문맥에 따라 달라지는 데, 원한을 가라앉히기 위한 간지(왕상1-11장, 잠2:1-2), 공정한 재판을 위한 도덕적인 판단력(왕상3:9, 12), 지성적인 총명과 백과사전적인 지식(왕상4:29-34)등이다. 그리고 지혜자란 비유동적인 고정집단이 아니라 유대인 사회의 각 계층에서 활동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히브리 지혜는 마술이나 제사라는 측면보다는 교육적인 측면, 즉 사물의 질서와 의미를 발견하는 것과 관련이 깊다.

    지혜문학은 구약 안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다른 책들이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적 입장(유일신 신앙, 계약사상, 구원의 역사등)에서 씌여진 반면, 지혜문학은 그 출발점이 신앙고백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관찰, 즉 인간의 지적인 활동이다. 지혜문학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적 확신이나 종교적 가르침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적인 지적 활동을 통해서 삶이 제기하고 있는 여러가지 해답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 그렇지만 지혜문학도 종착점에 있어서는 이스라엘의 신앙적 입장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지혜문학의 정신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적 관찰을 강조하는 데 있다. 따라서 신앙고백을 강조하는 구약의 주류의 입장과 인간의 이성적 추구를 강조하는 지혜문학과는 대조되는 관계에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의 생활철학을 뚜렸이 가진 민족이었다. 헬라사람들이 '인간으로서 무엇을 알고 살아야 하는 지식'을 가르친 민족이라면, 히브리인들의 삶은 '인간으로서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 신앙'을 가르친 민족이며 '신앙에 근거를 둔 생활철학'을 가르쳐 주고 있다. 구약의 생활철학들은 철저하게 인간의 현실생활을 체험한 경험철학을 단순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금언, 명귀, 얘기체, 드라마 형식, 대화형식 등이다. 이것을 지혜문학이라고 부른다. 지혜문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런 문장 속에 이스라엘의 삶의 지혜가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나타나는 지혜와 슬기는 다른 지혜문학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것이 아닌 야훼 하나님과 관련이 깊다.

    그 특징 중 하나로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은 다만 인간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도덕적인 책임을 지며 인간의 종교적인 개체성과 개인 생활에 관심을 가진 하나님께 대하여 인간이 어떻게 행하고 살아가야 하는 가를 보여 주고 있다.

    율법과 비교해 보면, 율법은 금지 조항과 적극적 권장(해라, 하지 마라)을 통하여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는 데 관심이 크다. 그러나 지혜문학은 개인의 삶에 중심을 둔다. 선과 악의 식별, 이해와 손실의 식별, 의와 불의, 공정과 부정등 일상생활의 윤리적 상황에 관심을 두고있다.

    2. 고대 근동의 지혜문학

    1)구약의 지혜문학은 본래 이스라엘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지혜문학은 그 기원에 있어서 고대 근동지역에서 일찍이 발달하였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주변국에서 발달한 지혜문학이 솔로몬 왕 때 이스라엘 안으로 수입되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국가적인 면모를 갖추고 근동지역에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된 때 였다.

    2)고대 근동에서 "지혜"란 이성과 관찰을 통한 지적인 활동의 총체이다. 곧 고대의 학문을 일컫는 말이다.

    3)고대 근동에서의 지혜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가)자연과학적 지혜(Scientific Wisdom)-고대의 자연과학, 천체현상, 의학, 건축술, 수학, 생물학, 측량술 등.

    나)실용적 지혜(Practical Wisdom)-고대의 사회과학 "성공적"인 삶의 길.

    다)사변적 지혜(Speculative Wisdom )- 고대의 철학, 인간존재에 관한 문제, 삶의 목적, 가치, 고난의 문제 등.

    3. 욥기

    인간은 왜 고통을 당하느냐? 이 물음은 아마도 욥기의 주제라 할 수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특별히 고통을 많이 겪은 민족인데 그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의 산물로 볼 수도 있다. 주인공 욥 은 결점 없는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런 그에게 고통이 찾아 온다. 소유한 재물에서, 열 남매의 자녀들에게서, 자신의 육신에 찾아 온 문둥병에서, 아내의 떠나감에서, 이 고통에 대한 친구들의 몰이해에서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냐? 이것은 욥기서 전체를 통한 욥의 주된 관심이다. 그의 친구들은 이 고난의 상태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하여 욥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한다. 그러나 욥은 고통 속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더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네 명의 친구들과의 변론이 시작된다. 이 내용이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욥기서를 통하여 고난을 극복하는 지혜를 얻는 것은 다음과 같다.

    1)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선을 행하면 복을 받는다는 공식적인 윤리규범을 어느 상황에서나 철칙으로 내세울 수는 없다.

    2)사람이 당하는 고통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원인 때문에 올 수도 있다.

    3)고통의 이유는, 교육적인 목적 때문만이 아니고 고통을 인하여 인간이 하나님과 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욥은 말하고 있다.

    4)대부분의 경우 고통을 받게 되면 하나님을 부정하게 된다. 그러나 욥의 경우,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더 가까이 볼 수 있으니 더 감사하고 더 찬송한다.

    이상은 지금까지의 인간고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서 인간의 모든 소유보다 하나님과의 교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지혜, 슬기의 최고봉이며,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 이해할 길을 마련한 것이다..

    4. 잠언서

    잠언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마샬'(masal)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의 뜻은 비슷함, 유사함이다. 이것은 구체적 의미에서 추상적 의미로 발전하기 때문인 것 같다. 잠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1~9장 : 신학적 지혜가 수록되어 있다. 솔로몬 제1잠언집

    2)10~22장 16절 : 실용적 지혜, 솔로몬 제2잠언집

    3)22장 17절~24장 22절 : 지혜로운 사람들의 제1잠언집

    4)24장 23절~24장 33절 : 지혜로운 사람들의 제2잠언집

    5)25~29장 : 솔로몬의 제3잠언집(실용적 지혜에 대하여 기록)

    6)30~31장 : 첨가 부분(아굴과 르무엘의 잠언, 현숙한 여인)

    잠언의 대전제는 최고의 지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지혜자는 자신이 행해야 할 명백한 길을 알고 있다. 잠언에서는 길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버려야 할 길은 악인의 길, 음녀의 길, 굽은 길, 패역자의 길, 사망의 길이며, 적극적으로 따라야하며 추구 할 길은 선한 길, 공평의 길, 의인의 길, 명철의 길, 바른 길, 생명의 길이다.

    구체적 실생활에 대한 지혜는 부모에게 효도, 남녀성에는 순결, 생업에는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게으르지 말것, 대인관계에는 교만 버리고 항상 겸손, 언어 사용시 혀를 조심할 것, 금주, 거짓말, 뇌물, 불의한 재물을 버릴 것, 공의, 진실, 화평을 도모할 것 등이다.

    그리고 사람이 어려운 기로 위에 섰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잠언에서의 답은 야훼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는 길 밖에 없다고 한다.

    5. 전도서

    이 책의 히브리어 명칭은 '코헬레트'이다. 이 말은 설교자, 전도자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 구조는 다음과 같다.

    1)1장 1절~11절 : 머리말(표제, 주제)

    2)1장 12절~6장 9절 : 인간 업적의 헛됨

    3)6장 10절~12장 8절 : 인간 지혜의 헛됨

    4)12장 9절~14절 : 결론

    전도서의 내용은 허무주의에 가깝다. 대표구절은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밝힌 1장 2절이다. 그러나 허무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헛됨을 시인하고 다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려고 한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적 실존에서 허무한 존재임을 알아야 하나님을 시인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쾌락 추구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따라서 최고의 슬기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3:11). 그리고 허무를 극복하는 길은 한가지,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는 사람만이 극복 할 수 있다는 것이다.

    C. 다섯 두루마리 책

    1. 룻기

    시대 배경은 작품이 기록된 때보다 800년 가량 거슬러 올라간 주전 1200년 무렵의 사사시대이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남편을 따라 모압으로 이주한 나오미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남편과 두 아들을 그곳에서 사별하고 절망과 허무를 안고 고향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아들과 결혼했던 모압 여인 중에 룻이 시어머니와 함께 동행하겠다고 하는 데서 분위기는 급변한다. 보리 추수기에 고향으로 돌아 온 그들은 빈털터리 였고, 유대인 보아스는 가난한 외국 여인, 룻을 위해 추수 때 일부러 이삭을 떨어뜨려 룻으로 하여금 줍게 하는 따뜻한 배려를 한다. 그 뒤 룻은 남편의 친족인 보아스와 결혼하여 오벳을 낳는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바로 다윗 왕을 낳았다.

    배타주의 사상과 외국인과의 결혼을 금지한 민족주의적인 사상에 저항하여 기록한 것이 아름다운 전원을 배경으로 한 "룻기"이다.

    2. 아가

    아가서의 히브리어 이름은'쉬르 하쉬름'이며'노래들 중의 노래'로 번역된다. 우리말 '아가'는 '아름다운 노래의 책'이란 뜻이다.

    아가서를 살펴보는 사람은 농도 짙은 남녀간의 사랑의 표현들이 이 책을 구성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학자들은 이 책이 정경안에 들어 오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을 생각하여 여러차원에서 해석하였다. 첫째, 아가서의 사랑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나타낸 것으로 이해 하였다. 그리고 훗날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으로 해석하였다. 둘째, 이 책의 내용은 결혼 축제를 위한 의식적 노래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솔로몬과 바로의 딸의 결혼을 위해 예비된 것으로 생각한다.

    아가서는 아직까지도 해석상의 문제를 많이 안고 있는 책이다.

    3. 전도서 (앞에서 논했기 때문에 생략함)

    4. 애가

    예레미야 哀歌서의 히브리어 표재는 "에이카"이며 "어찌할 꼬!"로 번역된다. 애가서는 슬픔을 기록한 책이다. 예루살렘 함락을 목격하고 그 슬픔을 읊은 것으로 587년 이후에 기록한 것으로 본다. 애가는 죄악 많은 유대에 임한 재앙과, 거룩한 도시와 주님의 성전에 임한 처참한 멸망을 애도하는 것이다. 이 아픔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손길을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은혜를 간구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구조

    다섯 개의 애가로 되어있다. 각 장이 서로 분리된 애가인데 그 내용은 서로 사상과 환경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즉 주전 587년 예루살렘이 파괴당할 때의 사정을 알려주고 그것을 슬퍼하는 공통성이 있다. 구조상 특수한 점은 1장에서 4장까지 각 장이 히브리 알파벳순서의 글자를 각 절의 첫머리에 둔다는 점이다. 그래서 각 장 알파벳 순서대로 22절을 가졌다. 제3장만은 히브리어 알파벳 글자 하나에 석 절씩 지어 66절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이런 시형은 상당히 후대의 것으로 기억의 편리를 위하여 고안된 것이라 한다.

    5. 에스더

    이 이야기는 페르샤 제국의 수도였던 수사에서 아하수에르란 이름의 왕이 통치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일어난다. 그 당시 모르드개는 유대인으로 관직에 있었고 부모를 잃어 양녀로 기른 그의 조카 미모의 에스더는 왕의 총애를 받는 왕비가 된다. 그 때 조정의 하만이라는 사람이 유대인들을 학살 할 계획을 세웠고 이를 안, 에스더가 부름을 받지 않고 왕에게 나가면 사형을 받을 줄 알면서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지혜로운 기지로서 자신의 목숨도 구하고 유대인의 학살 계획도 저지시킨다.

    이 책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이야기 전체는 박해에 직면한 유대인들의 생존과 승리에 관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기념하여 부림절로 지키고 있다.

    D. 묵시 문학

    1. 서론(17

    구약성경 중에서 가장 후대에 기록된 것은 다니엘서이다. 다니엘서는 그 당시 사회적 상황에 의해서 묵시문학적인 요소가 강하게 적용되어져 기록되었다. 따라서 다니엘서를 이해하기 위해서 묵시문학에 대하여 살펴볼 이유가 있다.

    포로기 이전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그들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포로기를 거쳐 포로기 이후에는 점차 예언 활동이 줄어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예언자들은 역사를 하나님의 활동 무대로 이해했다. 창조주 하나님은 역사의 심판자가 되시고, 구속 주가 되신다고 이해하였고. 따라서 역사는 하나님의 활동하는 무대이며,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는 장이다. 즉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나타난다(Revelation through history). 이러한 역사이해는 구약 신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오경, 역사서(신명기, 역대기 역사서),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모두 이러한 역사이해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역사적인 과정과 역사적인 현실을 통해서 현장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입장에서 역사의 의미는 분명하고, 명백하며, 역사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587년 유다왕국은 멸망하였고 바벨론 포로(Babylonian Captivity)라는 역사적 비극이 시작되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이 끝나고(538년) 귀향한 이후, 많은 시간이 흐름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예언자들이 보여 주었던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아름다운 꿈들은 역사적인 현실로 실현되지 않았다. 그리고 페르샤 제국(539-333) 이후의 희랍제국(333이후) 밑에서 수난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이러한 실망되는 상황에서, 역사의 무대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점점 멀어지게만 보였고, 역사의 의미는 불투명하게만 되어갔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역사에 대한 비관적인 입장까지 대두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는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일어나게 되었고, 이러한 역사이해 가운데서 묵시문학이 일어나게 되었다.

    포로기 이후 시대부터 예언자들은 천천히 퇴장하고 그 대신 묵시문학 전승이 일어나게 되었다. 예언자 활동이 끝나는 때와 묵시문학이 시작되는 때는 양자가 중복되어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이사야 56-66장, 스가랴 9장-14장 등이다. 이들은 예언이기는 하나 신학적으로 묵시문학적인 성격을 띄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들은 "초기 묵시문학"(Proto-Apocalyptic)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예언전승에서 묵시문학으로 넘어오는 교량적인 위치에 있으며, 구약 묵시문학의 출발점으로 본다.

    묵시문학은 전통적인 신앙의 논리로서 납득하기 어렵고, 또 설명하기 어려운 비극적인 역사적 현실, 악한 세력이 득세한 부조리 상황, 모든 희망이 단절될 듯한 절망적인 고난, 바벨론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이러한 삶의 자리(Situation in Life)에서 구약의 묵시문학이 잉태되었고 자라났다. 묵시문학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독특한 역사이해에 있다.

    첫째로 묵시문학은 현재의 역사에 대하여 극도의 비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현실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무대도 아니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현장도 아니라고 한다. 현재의 역사는 오히려 악한 세력이 장악하고 통치하는 시대라고 말한다. 하나님께 항거하는 악한 세력(Power of Evil)이 현재의 역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악한자가 흥하고 의로운 자들이 고통을 당한다고 보고 있다.

    악의 세력이 현재의 역사를 지배하고 있다면, 미래에 대한 희망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묵시문학의 역사이해에 따르면 역사가 연장되는 역사의 지평 위에서는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역사의 시간적 연장은 오직 악의 세력의 확대일 뿐이다. 따라서 묵시전통에 있어서 역사의 진행은 발전의 과정이 아니다. 미래의 희망은 오직 역사의 종말(eschation)에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묵시문학의 역사이해의 핵심부분이 되는 "시간적 이원론"(Temporal dualism)이 등장한다. 즉 시간을 두 시대로 구분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시간"(The present)과 "앞으로 올 시대"(The age to come)이다. 전자는 악의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암흑의 시대요, 후자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실 의로운 빛의 시대이다. "현재의 시대는 의로운 자가 핍박받는 시대요. 참된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수난당하는 시대이다." "미래의 시대"는 의를 지키고 신앙을 사수한 사람들이 빛난 영광을 누릴 시대이다.

    둘째로 묵시문학에서는 역사의 온 과정은 이미 확정되어 있다고 말한다. 역사는 미리 정해진 역사과정의 시간표에 따라서 종말(eschation)을 향해서 진행되고 있으며, 어떠한 궤도 수정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미래는 이미 결정된 미래이다. 묵시문학의 이러한 닫혀진 역사이해는 예언자들의 역사관과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미래는 열려진 미래이고, 얼마든지 수정 가능한 미래이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고, 이에 합당한 하나님의 징벌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죄의 길로부터 돌아서서 회개만 한다면 하나님의 징벌은 취소될 수도 있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피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이와는 달리, 묵시문학에서 역사는 모든 과정은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해 놓은 예정표에 따라서 단계적으로 종말을 향해 진행 될 뿐이다. 묵시문학은 이 종말의 날은 이미 임박하였고, 현재의 역사는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고 말한다.

    묵시가(Seer)란, 하나님께서 미리 확정해 놓으신 역사의 시간표(극비사항)에 대하여 계시받은 사람이었다.

    셋째로 묵시문학의 역사 이해에 있어서 "종말론"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묵시문학은 "역사의 종말"을 강조한다. 역사의 종말은 현재의 역사를 장악하고 있는 악의 세력이 파멸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새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의 암흑시대"에서 "앞으로 올 빛의 시대"는 어떻게 전환되는가? 묵시문학은 양자사이의 단절의 불연속을 강조한다.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역사가 완전히 종말됨으로써 "새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이 종말(eschation)은 역사를 장악하고 있던 악의 세력이 파멸하는 날이요, 옛질서가 붕괴되는 날이다. 따라서 묵시문학의 종말론은 절대적, 혹은 극단적 종말론(radical Eschatology)이다. 그런데 묵시전통에 의하면 이 종말은 앞으로 요원한 미래에 오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임박해 있는 종말이다. 묵시문학은 이렇게 "임박한 종말의식"때문에 수난과 시간도 곧 끝 날 것이며 따라서 새 시대가 도래하는 날도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악한 "현재의 역사"는 어떻게 끝나고 "새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가? 묵시문학에 의하면 악의 세력은 자멸하거나 자진해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파멸시키는 우주적인 대 전쟁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나님께서 무장(Divine Warrior)이 되시어, 악의 세력과 대결한다. 이 전쟁은 지상의 전쟁이 아닌 우주적인 차원의 초역사적인 대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결국 하나님은 승리하시고, 악의 세력을 전멸한다, 이로서 현재의 역사는 종말을 고한다. 이것은 곧 새창조로 이어진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다. 그러면 이 새창조의 세계에는 누가 참여하는가? 묵시문학은 수난과 핍박 중에도 의와 신앙을 사수해 온 "빛의 자녀"들만이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 갈 수 있다고 한다.

    묵시문학의 독특한 역사이해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억압과 고통, 혼돈의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역사이해는 어디까지나 신앙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듯한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의를 변호하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고수하려는 동기에서 묵시문학이 발생되었다. 묵시문학은 현재의 상황이 비록 암담한 상황일지라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신앙의 순수성을 고수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 것이라는 확신을 말해주고 있다.

    묵시문학의 외형적, 문학적 특징 중의 한 가지는, 저자는 본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 대신 과거 이스라엘 역사에서 위대한 신앙인들(예, 모세. 엘리야, 아브라함 등)을 책의 저자로서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가명성은 묵시문학의 특징이다. 또한 묵시문학은 이러한 유명한 인물들에게 하나님께서 역사의 진행과정과 마지막 종말에 관한 비밀을 보여 주신 형태로 되어있다. 묵시문학을 뜻하는 "Apocalyptic"이라는 말은 희랍어의 "apokalyptein"에서 온 것으로, 이것은 "비밀의 신비를 벗겨 보여준다"의 뜻이다.

    2. 다니엘

    묵시문학의 전성기는 200-100사이의 기간이었다. 이 기간동안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방대한 분량의 묵시문학이 쓰여졌다. 이 시대의 묵시작품 중에서 정경으로 인정받은 것은 다니엘서 뿐이다. 다니엘서의 배경은 바벨론 포로기로 되어있다. 그러나 실제로 다니엘서가 쓰여진 시기는 마카비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이스라엘 사람들이 극심한 종교적 탄압을 받고 있을 때이다(160년대).

    1)다니엘의 역사적 배경

    주전 333년 알렉산더는 페르샤 제국을 무찌르고 희랍제국을 건설한다. 알렉산더가 죽자, 그가 이룩해 놓은 거대한 제국은 4명의 장군에 의해서 사분되었다. 팔레스틴 지역은 이집트를 분할 받은 프톨레미의 지배에 들어갔고, 그의 관용주의 정책에 따라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은 비교적 평온을 유지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주전 198년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를 분할 받은 셀류시드 는 프톨레미로 부터 팔레스틴 지역을 빼앗고, 팔레스틴 지역을 귀속시켰다. 그의 정책은 통치지역을 희랍문명으로 통일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유대인에게도 희랍문명을 강요하였다. 특히 그 후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인들의 종교를 탄압하였다. 안식일과 할레를 금하고 성전안에 제우신을 세워 숭배하게 하고, 금기로 여기는 돼지고기를 희생제물로 바치고 또 강제로 먹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현실에 적응하려는 사람(헬레니스트)과 죽음을 무릅쓰고 신앙을 고수하겠다는 사람들(하시딤)로 갈라지게 되었다. 다니엘서는 신앙의 투쟁을 하였던 하시딤에 의해서 하시딤들을 위해서 씌여진 책이다. 즉 다니엘서는 종교적 박해 가운데서도 (1)변절하지 말고 신앙을 지킬 것과 (2)임박한 종말의 비젼을 보여줌으로서 하시딤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기록된 묵시문학이다.

    2)다니엘서의 내용

    두 부분으로 구분

    (1)1-6장 : 다니엘과 세친구에 관한 이야기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신앙의 순수성과 충성을 강조함.

    1장-다니엘과 세 친구의 율법준수(바벨론 왕궁에서) 2장-여러 제국의 멸망과 하나님의 통치 왕국 수립 예언 3-6장 풀무불 속에서도 변치 않는 신앙

    (2)7-12장  다니엘이 본 마지막 날의 묵시

    다니엘에게 보여진 역사의 시간표-상징적인 표현들

    네 가지 짐승-네 제국들, 금신상, 한 때 두 때 반 때-3년반, 1290일, 1335일- 모두 임박한 종말을 말해 줌.

    묵시문학은 역사적 현실에 대한 극단적인 실망과 좌절에서 현재의 역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가운데 생겨난 것이다. 즉 묵시문학은 신학자의 조용한 서재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혼란된 역사의 와중에서 신앙의 의인들이 핍박받는 역사 안에서,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 수 없는 삶의 자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묵시문학의 동기와 목적은 악의 세력이 비록 성할지라도, 결코 실망하거나 변절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승리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제6장 부록-왕조시대의 개혁과 포로기 이후의 개혁

    A. 왕조시대의 개혁

    왕조시대에 있었던 개혁 중 비교적 그 형태가 뚜렷하고 분명한 것은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이다. 히스기야는 주전 715-687년에 유다왕조를 통치했던 왕이다. 히스기야의 개혁은 정치적 개혁과 종교적 개혁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1. 히스기야의 개혁

    히스기야의 정치적 개혁의 동기는 그의 아버지 아하스왕의 친앗수르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앗수르의 침공을 막기 위해 굴욕적인 봉신의 입장에서 떠받들고 조공을 받쳐야 했다. 더우기 솔로몬 성전에 앗수르의 신을 위한 제단까지 만들어야 했던 상황이었다. 이처럼 유다는 모든 면에서 자신들의 자주권을 상실하였다. 아하스의 뒤를 이은 히스기야는 비교적 신중하게 앗수르에 대한 정책을 펼치며 기회를 기다렸다. 그 기회는 앗수르의 사르곤 대왕이 죽고 그 아들 산헤립(704-681)이 즉위하고 앗수르 제국내의 바벨론에서 므로닥-발라단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 산헤립의 통치권을 약화시키고, 블레셋, 모압, 에돔 등 앗수르 서남부지역과 에집트가 결합하여 반앗수르정책을 취하자 그동안 기회를 노리던 히스기야도 이 정책에 가담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바쳐오던 조공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앗수르의 보복을 예상하여 예루살렘성을 비롯하여 요새들을 강화하였다(역하 32:3-5).

    이러한 히스기야의 정책은 그의 민족심과 야훼숭배사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히스기야의 정책이 산헤립의 보복성 침공으로 비록 무산되었지만 그의 정책은 이스라엘의 독립의지를 표명한데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히 그의 종교개혁에서는 이러한 정신이 더욱 잘 표출되고 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우선 그는 그의 부친 아하스가 만들어 놓은 앗수르 신의 제단과 앗수르의 종교를 상징하는 물건들은 제거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속신앙의 상징인 산당과 주상, 그리고 아세라 목상을 제거한다.(왕상18:4) 히스기야의 개혁에 나타난 특징 중 하나는 모세가 만들었던 구리뱀을 제거한 사건이다. 지금까지는 구리뱀이 야훼종교와 별 마찰 없이 공존할 수 있었지만 점차로 야훼 종교의식이 발전되면서 가나안의 풍요종교의 상징인 뱀과 결탁되어 감을 인식하고 히스기야의 개혁에서 이를 제거한 것이다.

    히스기야는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거국적인 유월절 행사를 계획하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 유다뿐만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의 옛 영토까지 사람을 보내어 예루살렘 유월절 축제에 초대하였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그에게 분단된 이스라엘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의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2. 요시야의 개혁

    요시야가 즉위할 무렵에는 팔레스틴에 대한 앗수르의 지배력이 상당히 약화되고 있었다. 결국 앗수르는 나보폴라살에 의해 수도 니느웨가 멸망당하고 말았다. 유다의 요시야왕은 이런 절호의 기회를 틈타 국가독립의 기회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요시아의 정치개혁은 우선 사마리아와 므기또, 그리고 갈릴래아 지방을 쳐서 유다에 합병하였다. 그리고 요빠에까지 이르는 지중해 해안지역도 이 때 회복하여 그의 나라에 예속시켰던 것 같다. 이러한 요시야의 독립정책을 앗수르는 저지할 힘이 없었다. 앗수르는 612년에 수도 니느웨가 함락됨으로 멸망하게되었다. 요시야는 결국 이런 기회를 잘 포착하였으며 결국 그의 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다.

    그의 종교개혁은 성전수리로 부터 시작되었다(왕하 22:1-7). 이 과정에서 율법책이 발견되고 개혁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만이 이스라엘의 합법적인 유일한 성소라는 정책에 따라 지방에 산재해 있는 모든 지방성소와 산당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앗수르의 제단을 헐고 앗수르의 제의를 폐쇄하였다. 그리고 그 밖의 각종 제의와 우상숭배제도를 금지하였다. 요시야에게서도 히스기야와 만찬가지로 유월절행사가 종교개혁의 절정이 되었다(대하 35:1-19). 그는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북쪽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유월절 행사를 치루었다. 이와같이 남북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어 유월절행사를 치룬 것은 사무엘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요시야의 개혁도 위에서 살핀 것처럼 히스기야의 개혁과 비슷한 점이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3. 히스기야와 요시야 개혁의 특징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을 통해 왕조시대의 개혁을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왕조시대의 개혁은 왕실 주도하에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다.

    히스기야의 개혁과 요시야의 개혁에 나타난 특징은 첫째, 통일된 옛 이스라엘의 재건과 이에 따른 영토회복에 관심을 갖는다. 둘째, 유다왕정의 주도하의 온 이스라엘의 재통일을 위한 구심점으로 예루살렘을 재구축할 필요를 느낀다. 세째, 다윗 왕조의 전이스라엘 통치권을 다시 주장하고, 그 아래 남, 북 이스라엘의 재통일이라는 꿈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러한 특징들은 제의의 중앙 집중화와 반 앗수르 정책이라는 구체적 형태로 나타난다.

    B. 포로기 이후 개혁

    1. 에스라의 종교 개혁

    율법학자요, 서기관이요, 제사장인 에스라는 페르시아 왕의 위탁을 받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왔다. 에스라의 임무는 귀향한 공동체의 종교 생활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즉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르치고 거기에 따라 종교적 생활을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다(스7:25f). 한편 그의 권한은 유다에만 한정되지 않고 강 서편에 살고 있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적용된다. 에스라는 그밖에도 성전을 지원하기 위해 바벨론에 남아있는 포로민들로부터 기부를 받고(스7:15-19), 더 많은 비용이 소용 될 경우에는 왕실의 내탕고나 지방 행정기관의 공고를 일정한 한도내에서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스7:20-22).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잡혼이 성행하고 있었다. 에스라는 단호한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서술하면서 현 상태의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 설명을 했다(스 9장). 그러나 이에 대한 반응이 없자, 그는 대단히 격한 감정을 드러내어 울면서 야웨 앞에 백성들의 죄를 고백하니, 마침내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율법을 어긴 자들의 죄를 인정하고(스10:1-5), 자발적으로 이방인 아내들과 이혼할 것을 약속하면서 에스라가 어떤 조치를 취하더라도 그를 지지하겠다고 서약한다. 그 다음 에스라가 계속하여 단식하고 기도하는 동안, 방백들과 장로들은 모든 백성에게 사흘 안에 예루살렘에 출두하라고 명령하고 만약 불응할 때는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스 10:6-8).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도 그들은 에스라의 질책을 듣기 위해 성전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스 10:9). 백성들은 일기가 불순하고 또 진상을 조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겨 에스라에게 얼마간의 말미를 달라고 요청한다(스10:6-8). 그리하여 에스라가 임명한 위원회가 진상조사를 하게되어, 일은 즉시 착수되어 3개월 후에 그들의 일은 마무리된다(스10:16-17). 그 후 모든 잡혼이 파기, 해소된다(스 10:44). 잡혼문제가 파기되자 에스라는 백성들을 예루살렘에 모이게 하고 가지고 온 율법서를 낭독한다. 백성들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도 덧붙여지고 있다(느 8:7-8). 백성들은 너무 감격하여 땅에 엎드려서 운다(느 8:9). 에스라는 주의 성일의 기쁨을 이야기하면서 가까스로 그들의 울음을 제지한다. 다음날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사적으로 가르쳐 주고(느 8:13f), 초막 축제를 지내는 동안, 매일 율법을 더 자세히 읽어준다. 그 후 그들은 율법을 따라 살기로 서약한다(느 9:38, 10:29). 특히, 그들은 앞으로 다시는 이방인들과 혼인하지 않고,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으며, 7년마다 땅을 묵히고, 빚준 것 거두기를 포기하겠다고 서약한다(느 10:30-39). 그들은 또 성소를 유지를 위해 매년 스스로 세금을 부담하고, 제단에 쓰일 나무, 첫 수확물, 십일조를 율법이 규정한 대로 바치는 데 유의하겠다고 다짐한다. 이렇게 하여 율법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재조직하는 에스라의 임무는 완수된 것이다. 에스라에 의해 율법서는 백성들 앞에서 낭독되었으며 이후로 모세의 율법을 중심으로한 종교적 공동체로서 자기의식을 재정립하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느헤미야는 실제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공경에서 구하고, 그 정치적 지위를 인정받게 하고 공정한 행정을 실시하였을 뿐 아니라, 종교적 악습에 대해서도 단호한 조치를 하였다. 에스라는 주로 종교적 생활질서를 바로 잡는 일을 행하여 이스라엘이 모세의 율법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공동체로서 자기의식을 재정립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붕괴직전에 구하고 제 갈 길을 들어서게 한 공로를 종교적 개혁사업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주고 부추긴 느헤미야에게 돌릴 수 있다. 또한 가지고 온 율법서로 백성들의 삶을 바로잡은 에스라 역시 중요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역대기사가는 주로 종교문제에 대한 관심이 컸으므로 느헤미야의 정치적 사회적 차원에서의 활동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주로 종교적 임무만을 수행한 에스라의 활동을 우선적인 것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포로기 이후 공동체에서 전개된 개혁사업의 주요 공로를 에스라에게 돌리고 있다

    2. 에스라 개혁의 특징 ( 종교 개혁의 결과)

    에스라가 에루살렘과 유다에서 차례로 착수하였으며 그를 종교적인 개혁자요, 유대교 본래의 기초자로서 지시하는 두 가지 특징적인 조치들이 있었다.

    첫째는 율법을 백성들에게 낭독한 행위이다. 포로지에서 귀환한 후 좌절했던 공동체에게 새로운 시도가 되었다. 둘째는 그의 시대에 있어 가장 어려운 문제를 해결 하는 데 율법의 규정을 엄격하게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잡혼에 관한 문제였다. 물론 이런 조치는 달갑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오래된 토착민들은 자기 딸들이 소박을 맞고. 그들 모두가 예루살렘에서 부정한자로 따돌려진데 대해 격분하였을 것이다. Fohrer는 아마 소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18

    에스라의 사업은 유대와 예루살렘의 명백한 법률과 한계를 형성하는 점에 있다. 이것은 페르시아의 정책에도 부합되는 것이다. 페르시아의 정책은 그 광대한 왕국 전역에 통용되는 법률을 선포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방에 따라 조상 전래의 법률 체제를 국법으로 인가해 주는 것이다. 에스라가 유대교의 조상이 된다는 사실은 에스라 이후 이스라엘-유다의 율법이 페르시아의 국법으로 효과를 발생하였다는 것이된다.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야웨의 숭배자로서 인정을 받고, 유대인으로서 모든 법적 보장을 받으려면 이 율법을 지켜야 했다. 그 율법이 누구에게 적용되며, 누가 유대의 법령에 복종해야 되는지를 설명하고, 규정하는 것이 에스라의 조직적인 과제였다.

    유대교룰 위한 에스라의 업적은 매우 중요하였다. 사람들은 후에 그를 모세와 동일하게 놓았으며, 모세의 업적의 계승자요, 완성자로 표현했다. 사실상 에스라는 본래적인 유대교를 세우고, 역사, 율법과 함께 그 신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에스라의 활동은 유대공동체를 보존할 수 있었다.

    3. 느헤미야의 개혁

    느헤미야 개혁의 발생은 시대적인 정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벨론의 멸망과 동시에 한차례의 전환점을 맞은 이스라엘은 고레스의 칙령을 통하여 성전 재건의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느헤미야 이전까지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만큼의 원활한 공동체가 형성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공동체 내부로 부터 종교적, 도덕적 기풍이 해이해졌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은 직무에 태만하여 흠있는 제물을 바쳤고(말 1:6-14), 안식일이 무시되었으며(느 13:15-22), 더 나아가 이혼이 성행하여 사회문제가 되었으며(말 2:13-16), 약한 동포들을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고용인들이 늘어났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종교적 도덕적 광범위한 문란으로 공동체가 내부로부터 붕괴 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19 이런 모습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방인과의 통혼이 통례가 되었던 것에서 단적으로 증명되고 있다(느 13:23-27).

    그들은 여전히 자치적인 국가를 갖지 못했으며 따라서 다른 나라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위치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즉 이스라엘 공동체는 장기간의 식민지 지배를 받아 그 공동체가 깨어질 수밖에 없는 위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공동체는 역사적 어려움 속에서 존속하였다. 공동체가 존속할 수 있었던 그 요인은 바로 느헤미야가 실시한 개혁에서 비롯되고 있다.

    느헤미야는 445년 아닥사스다Ⅰ세때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자 유다 총독의 직분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428년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느헤미야와 함께 개혁을 추진하였다(느 2장).

    성벽재건은 산발랏과 토비야 같은 반대 세력에 의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 당시 민중들과 더불어 성벽을 완공하였다. 이 성벽작업에 참여했던 민중들은 자신들의 생활고에 의한 어려움을 폭로하고 느헤미야는 이들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다(1차 개혁).

    느헤미야의 1차 개혁의 특징은 구약의 약자보호법 중 희년법에 의한 조치였기에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구약성서가 알려주는, 이른바 약자보호법에 근거하여 개혁을 하였던 것이다. 희년법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실시되었던 근거는 찾아 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유일하게 느헤미야 개혁에서 희년법에 의한 조치가 있었다. 비록 시기적으로 정확하게 희년이 되어서 실시한 개혁은 아니었지만 현대까지 이스라엘 역사에서 단 한번 있었던 유일한 예이다.

    느헤미야의 2차 개혁에서는 그 동안 와해되었던 예루살렘의 성전제의에 대한 조치를 하면서 예루살렘을 중심한 유다 공동체의 질서를 회복시키고 있다. 유다 공동체에게 닥친 신앙적 위기를 이스라엘의 정통성 회복을 통하여 정체성을 확립하여 대처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개혁의 결과로 포로기 이후 유다 공동체는 자신들의 운명과 공동체의 방향성을 페르시아의 정책이나, 타자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선택할 수 있었다. 비록 그들의 외부적인 형태는 페르시아등 강대국의 식민지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공동체내부에서는 시대적 어려움을 자각하고 자신들의 운명에 대하여 스스로 선택하여,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힘을 발휘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 후대의 유대교의 모습이 국수주의적이고 율법적인 형태를 띠었으며, 그 원인이 느헤미야 개혁에서 비롯되었다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시대적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택한 것이다. 또한 개혁을 통하여 지향하고자 했던 평등 공동체의 모습이 외부적인 형태로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을 지라도 그 정신은 공동체내부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느헤미야 개혁이 이루어 놓은 보물과 같은 결과이다.

    이제, 구약성서를 읽는 독자들이라면 느헤미야의 개혁의 결과가 단지 후대 유대교에서 느끼게 되는 율법중심의 국수주의적 틀만을 제공하였다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딛고 사는 땅은 하늘나라가 아니며, 따라서 완벽한 그 어떤 사상도 존재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느헤미야의 개혁도 후대에 올바른 평가를 내린다면 느헤미야는 총독의 권리를 포기하며 이스라엘이라는 위기의 공동체를 이끌어간 지도자 입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였던 것을 높이 사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의 이런 노력에 큰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며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서 그의 정신이 계속 살아 숨쉬도록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느헤미야가 왕이 없는 시대에서 왕의 역할과 예언자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왕조시대에서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왕조의 부패함을 지적하고 백성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주었다.(20 그러나 포로기 이후 예언이 사라지고 율법이 강조되는 시대에 누가 민중을 대변해 줄 것인가? 느헤미야는 그가 비록 총독의 위치에 있었지만 백성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예언자의 역할을 하였으며, 한편으로 그는 왕이 아니었지만, 중앙 예루살렘에서 왕의 역할을 감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느헤미야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주로 느헤미야 개인에 집중하고 있다.

    박준서 교수는 느헤미야를 유능하고, 솔선수범하였던 청렴한 총독이였으며 이스라엘 역사중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21

    장일선 교수는 느헤미야의 비망록을 의지에 찬 한 사람의 산 기록으로 보고, 불굴의 사나이 느헤미야의 정신이 온 인류의 유산이 되었다고 한다.(22

    느헤미야는 그가 실시한 개혁 조치에서 희년정신을 실현하였다. 따라서 그 당시의 공동체는 가진자가 더 갖지 않게 되었으며 상대적 못 가진자가 갖게하는 평등한 사회로 개혁되였다(1차 개혁). 이런 느헤미야의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개인은 느헤미야 당시 포로기 이후 유다 공동체에서 용납되지 않았다(2차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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