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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일의 그 역사적 변천 과정
    주인장 낙서 2014. 3. 5. 14:48

    주일의 그 역사적 변천 과정


    주일과 안식일 논란은 일찌기 초대 교회에서부터 논란이 되어 왔던 주장이다. 가톨릭으로 귀일한 안티오키아-다마스커스를 중심으로 한 동방 시리아 교회는, 초대 교회 시기에 로마와 가장 격렬하게 신학적 논쟁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며, 가장 나중까지 유다교적 전통에 따라서 안식일을 지킨 곳이다. 


    1. 초대교회는 안식일 성수를 지켰나 아니면 주일성수를 지켰나?

    안식일 성수에 대해서 신약에서는 명시적 언급이 나타나 있지 않다. 하지만, 사도시대 때에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 공동체는 유다교의 한 분파로서 받아들여졌고, 12사도들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유다계 그리스도 공동체는 유다교의 관습에 따라서 안식일을 준수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리스도 공동체가 바리사이파에 대해서 신학적 정통성 논쟁을 벌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풍습에서 안식일 규례는 생소한 것이었고, 따라서 이방인 전교 문제에 대해서 예루살렘 회의에서 유다교적 율법(할례, 유월절의 절기, 안식일)적용이라는 결정에 대해서 이방인의 사도 바울은 반대의 뜻을 명확히 하고, 결국 베드로와 야고보의 제한적 동의를 얻어냈다.(할례 부분)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유다교의 율법을 엄격히 적용하려는 시도를 하지 말 것을 주문하였다. 

    이때부터, '주간의 첫날' 모임에 관한 기록이 사도행전이나 바울 서간문등, 성서에 단편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서는 주일 성수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2세기 전반의 문서인 '디다케', '바르나바의 편지', '이냐시오 서간'등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주일성수에 대한 교회 내적 규정이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당시 야고보파로 분류되는 유다계 그리스도 인들은 유다인의 율법인 안식일을 준수하였고, 바울파로 분류되는 이방계 그리스도 인들은 안식일 규례나 유월절 절기 준수 등의 전통적 율법 준수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던 듯 하다. 이는, 야고보파의 율법에 근거한 비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먹거나 마시는 일로, 또는 축제나 초하룻날이나 안식일 문제로 아무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 그런 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고 실체는 그리스도께 있습니다."라고 편지를 써 보내며, '유다교주의자들'의 주장을 배척한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유다교가 기독교를 저주하고, 그들의 울타리 밖으로 내어 쫒으면서, 이방계 그리스도 인들은 안식일 성수에 관심을 끊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지역 포교에 있어서, 안식일 준수의 의무는 로마측 지식인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했고, 이는 전도를 방해하는 요소가 되었으며, 바울도 그러한 문화적 차이를 미리 인식하고서, 위의 가르침을 그의 서간문에 적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로마를 위시한 서방 이방계 그리스도 공동체 내에서 주일 성수는 차츰 확고한 전통으로서 확립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2. 2~3세기, 주일 성수의 확립 과정

    기독교 저주와 얌니야 회의로 인해 유다교와 기독교가 신학적으로 결별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점차적으로 기독교계 내에서 주도권을 획득하면서, 현재의 가톨릭 교리들이 차츰 완성되어 간다. 그리고, 이그나티우스, 바르나바, 유스티니아누스등, 기독교의 여러 저명한 교부들도 주일 성수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한편, '바르코헤바'라고 하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일부 유다인들의 팔레스타인 대폭동으로 인해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그 사상적 근원인 유다이즘을 칙령으로 금하고, 특히 유다인의 대표적인 관습으로 인식되던 안식일 성수를 로마 법으로 금제한다. 이에, 박해를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부 동방 교회 쪽에서 지속되던 안식일 성수는 대부분 사라지고, 주일 성수가 기독교 내에서 공식적으로 지지받게 되었다. 여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라는 사실에서 오는, 반 유다교적인 정서가 기저에 깔려있는 측면이 있음도 부정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하지만, 안식일 성수 풍습 역시 이단인 에비온파나, 일부 동방교회 지역에서 여전히 남아 있었다. 즉, 로마 교회의 권위가 모든 기독교회에 고루 미치는 단계는 아직 아니었으며, 각 지역 교회는 로마 교회의 권위를 기본적으로는 존중하면서도, 각 지역에서 사도들이 전승한 전통이나, 유다교적인 전통들을 유지한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특히 유다인들의 후예가 많은 팔레스타인 지역과 시리아 지역에서는 안식일 성수를 준수한 교회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로마 교회 주교의 수위권이 점차적으로 기독교회내에 널리 통용되게 되면서, 이들은 차츰 압력을 받게 되었다. 


    3. 4세기 이후, 주일 성수의 확정 및 안식일 이단주의자들의 발호.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에 종교의 자유를 주었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의 일요일 공휴일 지정 칙령으로 주일성수를 지지하는 세력은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이후에 교회일치를 위해 열린 니케아 공의회에서, 일부 동방교회의 안식일 성수 지속 문제는 교회일치에 있어서 문제점으로 지적되기에 이르렀다. 안식일 준수파들은 이단으로서 배제되기 시작했으며, 기독교는 로마의 주요 종교인 미트라교를 굴복시키고, 로마의 최대 종교의 위치로 올라섰다. 

    교부들은 성서 목록을 확정하면서, 동시에 가톨릭적 체제를 완비하였는데, 이는 유다교와의 완전한 결별을 뜻하며, 그 결과로서 주일 성수는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이제 안식일을 지키는 기독교 일파는 이단으로 정죄되기에 이르렀으며, 그 전통을 유지해온 동방 교회 일부는 초기에는 페쉬타를 따로 확정하는 등, 격렬하게 반발하지만, 차츰 귀일 경향이 일어나면서, 로마 교회의 결정 사항을 결과적으로는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왈도파 등의 중세시대 안식일 이단이 종종 나타나지만,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종교개혁자들도 필로의 십계명 분류로 환원하면서도, 안식일 문제에 대해서는 가톨릭과 인식을 같이 하였다. 하지만, 십계명의 재환원은 주일 성수에 대한 비판적 요소를 키우는 것이었고, 이에 SDA등의 안식일주의자들이 다시 부활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내용출처 : 네이버 지식 답변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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